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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센터 실습생 소희의 비극…‘다음 소희’는 없어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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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25일(현지 시각)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상영된 폐막작 ‘다음 소희’는 콜센터 실습생 소희(김시은)의 이야기로 현지 관객을 울렸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25일(현지 시각)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상영된 폐막작 ‘다음 소희’는 콜센터 실습생 소희(김시은)의 이야기로 현지 관객을 울렸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2017년 이동통신사 콜센터 현장실습 여고생이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9살인 그는 인터넷·휴대전화 계약 해지를 방어하며 인격 모독이 가장 심한 이른바 ‘욕받이’ 부서에 배치됐다. 할당받은 고객 응대 횟수(콜 수)를 못 채우면 퇴근도 못 했다. 아버지에게 “배고프다”고, 친구에게 “죽어버리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등 안타까운 전조는 뒤늦게야 조명됐다.

“외국관객 눈물, 한국 상황에 공감한 것”

지난 25일(현지시각)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공개된 정주리(42) 감독 영화 ‘다음 소희’는 이런 실화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한국영화가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건 처음이다. 이날 현지에서 만난 정 감독은 “상영 중 들려온 외국 관객의 흐느낌에 깜짝 놀랐다”며 “한국 상황이고, 심지어 저도 잘 몰랐던 사실에서 출발해 ‘외국 관객이 공감할 수 있을까’ 했는데, 놀랐다”고 했다.

‘다음 소희’는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데뷔작 ‘도희야’(2014)에 이어, 정 감독이 배우 배두나와 뭉친 두 번째 장편이다. ‘도희야’에선 의붓아버지한테 학대받는 14살 도희를 지키려는 파출소장 영남이었던 배두나는, ‘다음 소희’에선 소희가 겪은 비인간적 고통을 수사하는 형사 유진으로 돌아왔다.

배두나는 올해 2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일정상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배두나는 올해 2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됐지만 일정상 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했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오디션을 통해 소희 역에 발탁된 신인 김시은도 사실적 연기로 몰입감을 더한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다음 소희’를 “칸의 숨은 보석: 도덕적 분노가 스릴러 비극을 만났다”고 소개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정주리 감독이 또다시 칸영화제 관객을 충격에 빠트렸다”며 김시은의 “조용하고 애절한 연기”를 칭찬했다.

콜센터의 인센티브 체불에 대들 만큼 씩씩했던 소희는 어떻게 벼랑 끝에 서게 됐을까. 정 감독은 “2017년 사건을 작년 초 접했을 때는 ‘왜 콜센터에 고등학생이 가지’ 했는데,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됐다”며 “자료를 더 찾아보고 기가 막혔다. ‘아이들이 어쩌다 이런 일을 겪었을까,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다음에도 비슷한 일이 또 벌어졌다. 그전과 똑같이 다들 분노하고 누군가 사과했지만, 다 잊어버리더라”라고 안타까워했다.

정 감독이 각본까지 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다음 소희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책임 통감과 회한의 몸부림이다. 댄서를 꿈꿨던 소희가 콜센터에서 시달리는 상황이 전반부를 채운다면, 후반부는 소희 사건을 맡은 형사 유진이 중심이다. 학교와 기업, 교육 당국의 부당한 관행과 시스템을 짚어가던 유진은 숨진 아이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어른들 태도에 분노하고 항변한다.

정주리 감독이 칸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칸 해변에서 25일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 [뉴스1]

정주리 감독이 칸영화제가 열리는 프랑스 칸 해변에서 25일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 [뉴스1]

“전부 취재한 사실이 바탕이 됐다. 도대체 이 시스템은 뭔지, 어떻게 굴러 왔는지, 최대한 이해한 범위 내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정 감독은 “다큐멘터리 대신 이야기 형식을 택한 건 고발하고 분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뭔가 지속적인 이야기가 사람들 마음에 남아야 조금이라도 다른 희망이 보이는 게 아닌가 해서다. 유진 같은 인물이 어딘가 있다는 희망을 갖고 싶었다”고 했다.

‘소희’란 이름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손톱’ 속 생계에 짓눌린 21살 동명 주인공에게서 따왔다. 정 감독은 “김훈 작가님이 소방관을 다룬 에세이에서 ‘화재 현장의 불길과 화염에 고립된 소방관에게, 동료가 다가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분 처지가 그렇게 고립된 상황이다. 거기에 그가 있다는 걸 아는 동료가 가야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찰’ 배두나와 어린 여성 간의 이야기란 점에서 ‘다음 소희’는 ‘도희야’를 잇는 시리즈처럼 보인다. 첫 구상부터 배두나를 떠올렸다는 정 감독은 “두 작품이 유사점은 있지만, 분명히 다른 영화”라고 선을 그었다. “영화진흥위원회 제작 지원을 받게 돼 제작이 본격화한 지난해 10월 초, 밤에 메일로 (배두나한테) 시나리오를 보냈더니, 다음 날 아침 직접 만나 ‘시나리오가 좋았다. 하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고레에다 감독, 도희야 촬영 때 응원와”

올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 ‘브로커’와 ‘다음 소희’까지 배두나 출연작 2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그는 넷플릭스 미국 작품 촬영 일정상 칸에 오지 못했다. ‘브로커’에서도 형사 역이다. 정 감독은 “고레에다 감독님이 ‘도희야’ 촬영 때도 (영화 ‘공기인형’을 같이 했던) 배두나 배우 응원하러 현장에 오셨다”며 “같은 해 칸에서 영화를 상영하게 돼 기쁘고 설렌다”며 웃었다. “두나씨는 (영화를) 찍는 내내 제겐 굳건한 동지였습니다. 제가 만든 그대로 이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누구보다 생각하고, 너무나 (연기) 잘했고, 부랴부랴 미국에 촬영하러 간 뒤에도 계속해서 ‘다음 소희’가 어떻게 되고 있나 궁금해하더군요. 지금 여기 없는 게 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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