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콜센터 실습생 비극, 칸 울렸다…정주리 "배두나는 굳건한 동지"

중앙일보

입력 2022.05.26 13:21

업데이트 2022.05.27 00:35

 '다음 소희'로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정주리 감독이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는 프랑스 칸 해변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 뉴스1

'다음 소희'로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정주리 감독이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는 프랑스 칸 해변에서 한국 취재진을 만났다. 뉴스1

2017년 이동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여고생이 저수지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아직 19살인 그는 인터넷‧휴대전화 계약해지를 방어하며 인격모독이 가장 잦은 ‘욕받이 부서’에 배치됐다. 콜센터가 할당한 고객 응대 횟수 ‘콜수’를 못 채우면 퇴근도 못 했다. 아버지에게 “배고프다”고, 친구에겐 “죽어버리겠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던 안타까운 전조들이 뒤늦게야 조명됐다.
지난 25일(현지 시간)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비평가주간에 공개된 정주리(42)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바로 이런 실화에서 출발한 작품이다. 한국영화가 비평가주간 폐막작에 선정된 건 이 영화가 처음이다. 같은 날 현지에서 만난 정 감독은 상영 중 들려온 외국 관객들의 흐느낌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한국적 상황이고 심지어 저도 잘 몰랐던 사실에서 출발해서 외국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놀랐습니다.”

‘다음 소희’는 그가 칸영화제 주목할만한시선 부문에 초청됐던 데뷔작 ‘도희야’(2014)에 이어 주연 배두나와 뭉친 두 번째 장편이다. ‘도희야’에서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의붓아버지에게 학대받는 14살 도희를 지키려는 파출소장 영남이 됐던 배두나는 ‘다음 소희’에서 소희가 겪은 비인간적 고통을 수사하는 형사 유진으로 돌아왔다. 오디션을 통해 소희 역에 발탁된 신인 김시은도 사실적인 연기로 몰입감을 더한다. ‘할리우드 리포터’는 ‘다음 소희’를 “칸의 숨은 보석: 도덕적 분노가 스릴러 비극을 만났다”고 소개했고 ‘사우스 차이나 모닝 포스트’는 “정주리 감독이 또다시 칸영화제 관객을 충격에 빠트렸다”면서 신인 김시은의 “조용하고 애절한 연기”를 칭찬했다.

"아이들 비극 반복…매번 분노하고 잊어버려" 

'다음 소희'(사진)는 정주리 감독, 배우 배두나가 정 감독의 데뷔작 '도희야' 이후 8년만에 다시 뭉친 작품이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다음 소희'(사진)는 정주리 감독, 배우 배두나가 정 감독의 데뷔작 '도희야' 이후 8년만에 다시 뭉친 작품이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콜센터의 인센티브 체불에 대들 만큼 씩씩했던 소희는 어떻게 핏기없는 얼굴로 벼랑 끝에 서게 됐을까. “2017년 사건을 작년 초 접한 당시에는 ‘왜 콜센터를 고등학생이 가지’ 하고 의아했는데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됐다”는 정주리 감독은 “자료를 더 찾아보며 기가 막혔다. 아직 성년이 지나지도 않은 아이들이 도대체 어쩌다 이런 일들을 겪었을까.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다음에 또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이전과 똑같이 다들 분노하고 누군가 사과했지만, 이 영화 촬영에 들어갔을 때쯤엔 다 잊어버리더라”고 안타까워했다.
그가 각본까지 쓴 영화는 제목 그대로 ‘다음 소희’가 나와서는 안 된다는 책임 통감과 회한의 몸부림이다. 댄서를 꿈꿨던 소희가 콜센터에서 시달리는 여정이 전반부를 채운다면, 후반부는 소희 사건을 맡은 형사 유진이 중심이다. 학교와 기업, 교육 당국의 부당한 관행과 시스템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던 유진은 숨진 아이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어른들의 태도에 분노하고 항변한다.

 '다음 소희'에서 배두나와 함께 영화를 이끄는 소희 역할은 신인 배우 김시은이 연기했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다음 소희'에서 배두나와 함께 영화를 이끄는 소희 역할은 신인 배우 김시은이 연기했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전부 취재한 사실이 바탕이 됐다. 도대체 이 시스템은 뭔가. 대체 어떻게 굴러가 왔는지 최대한 이해한 범위내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정 감독은 “다큐멘터리보다 이야기의 형식을 택한 건 고발하고 분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뭔가 지속적인 이야기가 사람들 마음에 남아야 조금이라도 다른 희망이 보이는 게 아닌가, 했다. 유진 같은 인물이 어딘가 있다는 희망을 갖고 싶었다”고 했다.

"독보적 아우라 배두나, 제겐 굳건한 동지"

 영화 '다음 소희'에서 유진은 소희의 발걸음을 되짚으며 벼랑에 내몰린 상황과 마음을 이해해간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영화 '다음 소희'에서 유진은 소희의 발걸음을 되짚으며 벼랑에 내몰린 상황과 마음을 이해해간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소희’란 이름은 권여선 작가의 단편소설 ‘손톱’에서 생계에 짓눌려있는 21살 동명 주인공에게서 따온 것이다. 콜센터의 숨 막히는 소음에서 걸어 나온 소희의 마지막은 삶의 의지가 모두 산화해버린 듯 고요하다. 정 감독은 “김훈 작가님이 소방관을 다룬 에세이에서 화재 현장의 불길과 화염에 고립된 소방관에게 동료가 다가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글이 기억에 남는다”면서 “제가 보기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많은 분의 처지가 그렇게 고립된 상황이다. 아무리 소리쳐도 그 연기와 불길 밖에서는 모를 수 있다. 거기 그가 있다는 걸 아는 동료가 가야만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누군가는 찾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경찰이 된 배두나와 더 어린 여성 간의 이야기란 점에서 ‘다음 소희’는 ‘도희야’를 잇는 시리즈처럼 보이기도 한다. 배두나의 “관객을 사로잡는 독보적 아우라” 때문에 첫 구상부터 그를 떠올렸다는 정 감독은 “두 작품이 유사점은 있지만 분명히 다른 영화”라고 선을 그었다. 또 “영화진흥위원회 제작지원을 받게 되고 제작이 본격화한 지난해 10월초 밤에 메일로 시나리오를 보냈더니 (배두나가) 다음날 아침 직접 만나 ‘시나리오가 좋았다’고 ‘하겠다’고 하더라”면서 이후로도 “배두나 배우랑은 언제든, 어떤 이야기든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또 형사가 될지 전혀 다른 인물이 될지는 모르겠다”고 여지를 남겼다.

고레에다 '도희야' 현장 다녀가…"같은해 상영 영광이죠"

배두나는 올해 영화 '다음 소희'(사진)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2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배두나는 올해 영화 '다음 소희'(사진)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브로커' 2편이 칸영화제에 초청됐다.. [사진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올해 배두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와 ‘다음 소희’까지 2편의 출연작이 칸영화제에 초청됐지만, 넷플릭스 미국 작품 촬영 일정상 칸에 오지 못했다. ‘브로커’에서도 형사 역할이다. 정 감독은 “고레에다 감독님 너무나 존경하고 ‘도희야’ 촬영 때도 (영화 ‘공기인형’을 같이 했던) 배두나 배우를 응원하러 현장에 오셨었다”면서 “같은 해 칸에서 영화를 상영하게 돼서 기쁘고 설레다. ‘브로커’에서 두나씨 배역 이름이 (‘다음 소희’의 유진과 비슷한) 수진이더라. 재밌는 일”이라며 웃었다. “두나씨가 어떻게든 와보려고 굉장히 노력했더라고요. 찍는 내내 진짜 제겐 굳건한 동지였습니다. 제가 만든 그대로 이 영화가 나와야 한다고 누구보다 생각하고 너무나 (연기) 잘했고 부랴부랴 미국에 촬영하러 간 뒤에도 계속해서 ‘다음 소희’가 어떻게 되고 있나 궁금해하더군요. 지금 여기 없는 게 너무 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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