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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명의 인문학 고수들이 말한다, 이게 바로 행복의 비밀 [백성호의 한줄명상]

중앙일보

입력

“고통과 행복은  자연의 일부다”  

#풍경1

궁금했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이 다르고,
사람마다 꿈꾸는
행복의 풍경이 달랐습니다.

사람들마다 꿈꾸는 행복의 풍경은 다르다. 밤하늘의 별처럼 다양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그런 물음을 안고 인문학자들을 만났다. [중앙포토]

사람들마다 꿈꾸는 행복의 풍경은 다르다. 밤하늘의 별처럼 다양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거기에는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그런 물음을 안고 인문학자들을 만났다. [중앙포토]

그래도 무언가
공통분모가 있지 않을까.
그런 물음표를 안고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인문학자 17명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심리학자부터 종교학자, 천체물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교육학자, 미학자, 생물학자 등
17개 인문학 분야의 고수들을 만났습니다.

혹자는 묻더군요.
천체물리학은 과학이 아니냐.
과학이 어떻게 인문학이냐고 말입니다.
사실 ‘인문학(人文學)’의 정의는
‘인간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러니 문과와 이과를 나누어서
문과 쪽만 인문학이라고 보는 건
너무 협소한 관점이 아닐까요.

인간에 관한 학문,
그 모두가 저는 인문학이라고 봅니다.
왜냐고요?
그 모든 학문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고,
따지고 보면 결국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분야를 깊이 파고, 바닥을 뚫은 이들의 안목은 남다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고수라고 부른다. [중앙포토]

한 분야를 깊이 파고, 바닥을 뚫은 이들의 안목은 남다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고수라고 부른다. [중앙포토]

왜 고수를 만났느냐고요?
나름대로 자신의 분야를 뚫은 사람을
우리는 ‘고수(高手)’라고 부릅니다.
그런 사람은 전체를 바라보고
핵심을 짚어내는 안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의 창,
종교학의 창,
천체물리학의 창,
역사학의 창
뇌과학의 창 등을 통해서
바라보는 행복은 과연 어떤 걸까.
거기에는 어떤 공통된
무언가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정말 공통된 무언가가 있다면,
‘행복’이란 파랑새를 찾아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이정표라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안고서
17명의 인문학 고수들을 만났습니다.

#풍경2

1주일에 한 명씩,
거의 다섯 달 가까이 고수들을 만나서
인터뷰를 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을 내다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창의 색깔에 따라 바깥 세상의 풍경도 달라진다. [중앙포토]

사람은 저마다 세상을 내다보는 자신만의 창이 있다. 창의 색깔에 따라 바깥 세상의 풍경도 달라진다. [중앙포토]

제게는 무척 흥미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왜냐고요?
그들이 바라보는 창(窓)은
무척이나 달랐거든요.
사용하는 단어도 다르고,
적용되는 문법도 다르고,
그들이 가진 인문학의 정서도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천체물리학자는
빅뱅과 별, 우주와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심리학자는 상처와 온전함,
그리고 마음을 말했습니다.

뇌과학자는 선택과 불일치,
그리고 인간의 극복 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철학자는 세상과 호기심,
그리고 틀에 갇히지 않는
생각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역사학자는 1000년을 뛰어넘는 시간,
과거와 미래, 그리고 세상의 평(平)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풍경3

인문학자들이 바라보는 창은
각자 다 달랐습니다.
각자의 창을 통해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
그 풍경 역시 달랐습니다.

진리는 하나다. 만약 둘이라면 그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전체를 안고,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진리는 하나다. 만약 둘이라면 그건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전체를 안고, 전체를 관통하기 때문이다. [중앙포토]

그럼 행복은 어떨까요.
그 풍경 속에 서 있는 행복에는
과연 공통분모가 있을까요.

진리는 하나입니다.
만약 진리가 둘이라면
그건 진짜 진리가 아니겠지요.

진리는 모든 걸 관통하는데,
그게 둘이라면 절반만 관통할 테니까요.

하나의 진리,
그렇지만 그 진리에 오르는 길은
여럿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역사, 문화, 전통, 자연환경에 따라서
하나의 진리이지만,
찾아가는 길은
각자 다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고 정상에서 모이는
하나의 꼭짓점이 달라지진 않습니다.

행복도 그랬습니다.
17개의 인문학,
저마다 가리키는 손가락의 모양은 달랐지만
그 끝에 서 있는 ‘행복’이란
달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풍경4

빅뱅 이후 우주는 138억년 동안 진화돼 왔다. 인류는 그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등장했다. [중앙포토]

빅뱅 이후 우주는 138억년 동안 진화돼 왔다. 인류는 그 역사의 끄트머리에서 등장했다. [중앙포토]

천체물리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빅뱅 이후 펼쳐진
   우주의 역사는 138억년이다.
   그 어마어마한 시간 속에서
   생명의 진화가 있었다.
   그 진화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게
   다름 아닌 인간이다.
   이러한 우주의 도도한 흐름,
   그 끝에 지금 내가 서 있다.
   다시 말해,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138억년이란 우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걸 생각하면
   삶은 한 번 살아볼 만하지않으냐는
   희망과 용기가 생긴다.”

생물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생의 동물은 자연을 따라서 산다.
   아니, 이미 그들이 자연이다.
   루소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미안하지만,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대신 자연으로부터 배울 수는 있다.
   자연에는 행복도 있지만 고통도 있다.
   죽고 죽이는 살육의 파티도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그게 자연의 속성이다.
   그런데 인간은 편안함과 행복감만
   누리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달콤함만 맛보려고 한다.
   정말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행복과 함께 고통도 배워야 한다.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에 대해서도 열리게 된다.
   삶과 죽음,
   아름다움과 추함도 마찬가지다.
   한쪽만 편식할 때,
   우리는 양쪽 모두에 대해 막히게 된다.”

#풍경5

이런 식의 인터뷰를 하나, 둘,
마침내 열일곱 개를 모두 마쳤습니다.
그리고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무엇일까.
17명의 인문학자,
열일곱의 인터뷰를 모두 마친 뒤
내가 바라보는 ‘행복의 달’은 어떤 모습인가.

있었습니다.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행복’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삶의 행복,
그 행복의 파랑새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또렷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파랑새를
멀리서만 찾았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미래의 어느 한 지점에서
찾았습니다.
그때는 내가 행복하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내 주위에는 파랑새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새의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파랑새를 바깥에서 찾는다. 정작 파랑새는 내 안에 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그 파랑새를 찾기는 무척 어렵다. [중앙포토]

우리는 늘 파랑새를 바깥에서 찾는다. 정작 파랑새는 내 안에 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기 전에는 그 파랑새를 찾기는 무척 어렵다. [중앙포토]

그런데 말입니다.
17개의 인문학 인터뷰,
그 모두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는 이랬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행복을 음미할 줄 알아야 한다.”

#풍경6

자연에는 고통과 행복이
공존합니다.
인간의 삶도 그렇습니다.
왜냐고요?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니까요.

저는 콤비네이션 피자 한 판이
생각났습니다.
집으로 배달된 피자를 열어보면
조각이 여럿입니다.
토핑에 따라 맛도 여럿입니다.

삶에는 행복의 맛과 고통이 맛이 섞여 있다. 둘 중 하나만 취하는 건 편식이다. 그건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무리 아픈 고통의 순간이라도 이미 내게 주어진 행복이 숨겨져 있다. [중앙포토]

삶에는 행복의 맛과 고통이 맛이 섞여 있다. 둘 중 하나만 취하는 건 편식이다. 그건 자연스럽지 못하다. 아무리 아픈 고통의 순간이라도 이미 내게 주어진 행복이 숨겨져 있다. [중앙포토]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나요.
콤비네이션 피자처럼
섞여 있습니다.

행복의 순간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고통의 조각이 있고,
고통의 순간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도 행복의 조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의 조각만 택해서 편식을 한다면
어찌 될까요.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겠지요.

반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나에게 이미 주어진
행복의 조각을 맛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그 사람은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아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니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더군요.
이미 내 주머니 속에 앉아 있습니다.
다만,
그 새를 바라볼 줄 알고,
새의 노래를 들을 줄 알고,
자유로운 날갯짓을
맛보며 감상할 줄 아는 일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더군요.

우리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조건은 외부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일까. [중앙포토]

우리는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 조건은 외부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내부에 있는 것일까. [중앙포토]

고통과 행복이 섞인
콤비네이션 피자에서
나는 고통의 조각만 골라서
편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앞에 이미 놓여 있는
행복의 조각도 맛보며 살 것인가.

“인간은 정말 행복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결국
나에게 이미 주어진 행복의 조각을
음미할 줄 아는가,
음미할 줄 모르는가의 문제가 아닐까요.

〈‘백성호의 한줄명상’은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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