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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밖에 갈 곳이 없었다” 전쟁 피해 온 우크라 고려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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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지난 3월 한국에 입국한 우크라이나 고려인 아나스타시아 씨가 인천 고려인문화원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 로만씨는 오는 6월 다시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김경록 기자

지난 3월 한국에 입국한 우크라이나 고려인 아나스타시아 씨가 인천 고려인문화원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 로만씨는 오는 6월 다시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김경록 기자

“집 앞에서 비행기가 낮게 날아다녔고, 폭탄과 미사일 터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어요.”

우크라이나 국적 고려인(옛 소련 지역 거주 한민족) 3세 아나스타시아(32)씨는 지난 2월 전쟁이 시작되던 날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기억을 송두리째 지우고 싶을 정도로 공포스러웠지만 어린 두 딸을 바라보며 정신을 바로 차렸다고 한다.

급하게 짐을 싸서 바로 집을 나섰다. “왜 집에 못 돌아가느냐”며 칭얼대는 5살 딸에게는 세계 여행을 떠나는 것이라고 타일렀다. 평소 9시간 거리인 우크라이나 서쪽 국경까지는 25시간, 하루가 꼬박 걸렸다. 버스 기사의 도움을 받아 도착한 폴란드 국경 마을에서 피란민을 받아주겠다는 한 자원봉사자를 만났다. 아나스타시아 가족은 그의 집에서도 위협을 느꼈다. 아나스타시아는 “집주인이 SNS에 피란민을 돕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올리며 우리 가족 사진을 올렸다”라며 “결정적으로 그가 마약을 하는 것을 알게 돼 딸들이 걱정돼 그곳을 떠나기로 했다”고 말했다.

한국서 3개월 체류 허가 받고 입국

절박한 상황에서 아나스타시아가 떠올린 유일한 안식처는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이었다. 이미 그의 어머니는 1년 전 여동생과 함께 한국에 정착했다. 우크라이나인과 결혼한 아나스타시아만 우크라이나에 남아있었으나 전쟁으로 불안정한 피란 생활이 이어지자 한국 행을 결심하게 됐다. 아나스타시아는 “한국 밖에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3월 입국해 어머니와 여동생을 만난 후에는 비로소 전쟁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을 ‘조국’이라고 표현했다. “조국이 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라고 말했다.

전쟁에선 벗어났지만, 생활은 여전히 불안하다. 우크라이나에서 나고 자란 탓에 그는 우리 말에 서툴다. 그는 사는 집의 월세와 두 딸을 맡길 어린이집 비용 등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해 홀로 아르바이트에 나섰다. 최근 자동차 공장에서 부품을 조립하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살고 싶다”는 그에게 가장 큰 걱정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건강보험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저희는 아프면 절대 안 된다”며 “아이들이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된다”고 답했다. 아나스타시아의 남편인 로만 씨는 우리 정부에 3개월 인도적 특별체류 허가를 받고 입국했다. 오는 6월이면 다시 우크라이나로 떠나야 한다. 언제 전쟁이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어린아이들을 홀로 책임져야 하는 미래에 그녀는 막막함을 느낀다고 했다.

아나스타시아처럼 전쟁을 피해 국내에 입국한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는 5월 기준 1200명에 달한다. 모국으로 피란 온 고려인 동포들은 가족·친척·친구 등 연고자가 거주하는 경기 안산, 인천광역시 등 전국 고려인 밀집 거주 지역에서 체류하고 있다.

김영숙 고려인문화원 ‘너머’ 상임이사는 “남성의 경우 징집 등으로 출국이 금지돼 있어서 피란민 대부분은 어린아이와 여성, 고령의 노인들”이라면서 “전쟁 통에 옷가지도 못 챙기고 몸만 빠져나온 사람도 있을 정도인데, 한국에 온 이들에게 주거비, 생계비 등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들이 전혀 없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사랑의열매)는 ‘국내 입국 우크라이나 고려인 긴급지원사업’을 통해 전쟁 피해를 본 고려인 동포들에게 긴급한 생계비, 의료비, 생필품 등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2월 24일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일어난 이후 피란 목적으로 국내에 입국한 고려인 동포와 그 가족이 대상이다. 월 1회 20만원 이내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긴급의료지원이나 긴급생필품 지원을 한다.

또 정신적 피해를 보듬어주는 상담·치료 프로그램도 지원한다. 차의과대학 등 전문 기관, 강사와 연계해 긴급심리상담을 하고, 미술 치료도 제공한다. 고려인 동포들이 입은 전쟁 피해를 치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현재 201가정, 612명이 도움을 받고 있다.

이러한 지원 움직임에 우크라이나 고려인 동포들은 입을 모아 “감사하다”라고 말했다. 지난 3월 세 명의 자녀와 입국한 고려인 동포, 박 스비에틀라나 씨는 “21개월짜리 막내 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한국 땅을 밟았다”며 “그렇게 힘들게 온 한국에 저희를 위한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감동이다. 한국 정부와 지원 단체들에 감사하다”고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난 4월 한국 땅을 밟은 또 다른 고려인 동포, 김 아나스타시아 씨 역시 “전쟁 때문에 지하에 숨어 있으면서 고통을 받았다”라며 “한국이 받아주고, 또 이렇게 도와줘서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다.

사랑의열매는 지난 3월 우크라이나 난민 구호를 위해 80만 달러(약 10억원)를 긴급 지원했다.

사랑의열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는 지난 2월 우크라이나-러시아 간 전쟁 발발 이후 한국으로 탈출한 우크라이나 고려인(재외동포)을 지원하기 위한 기부 캠페인을 오는 31일까지 진행한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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