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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쿠션 마이클 조던' 이상천의 딸, 프로당구 도전 "아빠 이름 잊혀지는게 싫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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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프로당구에 도전하는 올리비아 리. 그는 한국당구의 전설 이상천의 외동딸이다. 김경록 기자

프로당구에 도전하는 올리비아 리. 그는 한국당구의 전설 이상천의 외동딸이다. 김경록 기자

“한국 당구장에서 지인이 ‘이상천의 딸’이라고 소개했는데, 젊은 분이 아빠가 누군지 모르더라고요. 지금 시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아빠 이름이 잊혀지는 게 싫었죠. 그래서 프로당구에 도전하게 됐어요.”

22일 서울 강남구 브라보캐롬클럽에서 만난 올리비아 리(30)가 아버지 대를 이어 큐를 잡는 이유를 밝혔다. 그는 이달 초 프로당구협회(PBA) 여자부 우선 등록 선수(8명)에 합격했다.

뉴욕타임즈로부터 스리쿠션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찬사를 받은 이상천. [중앙포토]

뉴욕타임즈로부터 스리쿠션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찬사를 받은 이상천. [중앙포토]

올리비아 리는 고 이상천(1954~2004)의 외동딸이다. 이상천은 1987년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당구계를 평정한 ‘한국 당구의 전설’이다. 1990년부터 12년 연속 미국당구선수권대회 3쿠션을 제패했고 41연승을 기록했다. 뉴욕타임스가 “스리쿠션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표현할 정도였다.

앞서 이상천은 서울대 응용수학과(현 수리과학부)를 다니다가 중퇴했다.  올리비아 리는 “아빠는 공부를 별로 안하고 서울대에 들어갈 만큼 수재였고, 당구를 치고 싶어 학교를 그만뒀다고 들었다. 엄마가 ‘아빠는 뭐든지 어설퍼서 운전도 대신했다. 그런데 당구 칠 때 만큼은 희한하게 절대 흥분하지 않았다’고 말해줬다”고 전했다.

1992년 뉴욕에서 태어난 올리비아 리는 “엄마가 가수 올리비아 뉴튼 존을 좋아해 이름을 ‘올리비아’라고 지었다. 미국 대학에서 약학을 전공하다가 2015년 한국에 들어와 강사를 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국어로 인터뷰했지만 가끔 헷갈리는 단어는 휴대폰으로 검색해 말했다.

올리비아 리는 “당구 정식 대회는 나간 적이 없고 2017년 미국 당구 동호회 대회에 출전한 정도다. 2018년에 당구 선수인 정상훈과 결혼했다. 점수는 25점 정도다. 요즘 남편이 대구에서 운영하는 당구장에서 하루에 10시간씩 훈련 중”이라고 했다. PBA 관계자는 “핸디캡 점수는 국제식 대대 기준으로 본인 경기 에버리지에 따라 정한다. 25점은 LPBA(여자프로당구) 선수 120명 기준으로 평균 정도의 실력”이라고 설명했다.

올리비아 리는 “당구장에서 별의별 욕을 다 들어봤다. ‘아빠는 왼손잡이인데, 넌 왜 오른손을 쓰냐’, ‘딸이 당구 실력 말고 외모 DNA만 물려 받은 거냐’ 같은 얘기다. 대단했던 아빠의 이름에 먹칠할까 두려워 선수는 하기 싫었다. 엄마도 프로 도전을 반대했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아빠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시작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올리비아 리는 이날 ‘Sang Lee’가 적힌 경기복을 입고 있었다. ‘쌩 리’는 부친이 미국에서 불렸던 이름이다.

왼손잡이 이상천은 책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 칠 만큼 창의적이었다. [중앙포토]

왼손잡이 이상천은 책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 칠 만큼 창의적이었다. [중앙포토]

왼손잡이 이상천은 책에 없는 기술을 만들어 칠 만큼 창의적이었다. 올리비아 리는 “제자들이 올린 영상을 보면 아빠 자세는 엎드리지 않고 반쯤 서서 쳤다. 감각이 좋아서 본인이 그리고 싶은 모양대로 당구를 쳤다”며 “아빠가 내게 당구를 가르쳐주다가 10살 때 포기했다. 그래도 아빠처럼 숫자 대신 모양을 보고, 다양한 자세로 치려고 노력한다. 아빠는 부드럽게 치는 반면 난 강하게 치는 스타일이다. 물론 난 아빠에 비하면 아직 많이 부족하다”고 했다.

부친 이상천의 자세를 따라하는 올리비아 리. 김경록 기자

부친 이상천의 자세를 따라하는 올리비아 리. 김경록 기자

이상천은 생전에 미국에서 대형 ‘캐롬 카페’를 열어 사업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올리비아 리는 “뉴욕 플러싱에서 바, 식당, 포켓볼, 캐롬 등을 갖춘 캐롬 카페를 운영했다. 그런데 아빠가 사비로 한국에서 대회를 열면서 돈을 다 날렸다”고 했다.

당구는 요즘 TV 중계되고 스포츠로 인정 받고 있지만, 과거에 당구장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자욱한 담배연기, 동네 건달들의 아지트였다. 당구 문화를 바꾸고 싶었던 이상천은 전국을 돌며 당구대회를 열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출전해 은메달을 땄고, 2004년 대한당구연맹 회장에 취임했다. 가수 이승기의 뮤직비디오에서 당구장이 탈선 장소로 나오자 방영 금지해달라고 법적 대응하기도 했다. 올리비아 리는 “아빠의 성격이 그랬다. 당구장에서 술 마신 사람은 당구를 못 치게 혼냈다. 그게 매너이자 예의라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이상천은 위암으로 2004년 50세에 요절했다. 올리비아 리가 13살 때였다. 올리비아 리는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허리가 아프다며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런데도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며 당구 일만 했다. 등 떠밀어 병원에 갔는데 위암 판정을 받았다.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며 5개월간 투병 하다가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했다.

부친 이상천이 우승하면 했던 만세 세리머니를 재현한 올리비아 리. 김경록 기자

부친 이상천이 우승하면 했던 만세 세리머니를 재현한 올리비아 리. 김경록 기자

미국당구협회는 2007년 명예의 전당에 이상천을 올렸다. 올리비아 리는 “엄마랑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대신 수상했다. 아빠의 생전 영상을 보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다음달 데뷔 무대를 앞둔 올리비아 리는 “조기 탈락해 실망 시켜 드릴까 봐 불안한 마음이 크다. 그래도 아빠는 제가 뭘 하든 지지해주셨다. 하늘에서 보며 프로에 도전한 걸 잘했다고 응원해주실 것 같다. 아빠는 우승하면 큐를 두 팔을 벌렸다. 나도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 우승한다면 아빠처럼 만세 세리머니를 해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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