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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이번이 외환·금융위기보다 무서운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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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불행하게도 10여 년 주기의 경제위기가 닥치고 있다. 이번 위기는 전 세계적 현상인데다 대책이 마땅치 않다. 재정이 부실해져 정부의 역할에도 한계가 있다. 가계 부채(지난해 말 1862조 원)가 쌓여있고, 부동산·주식 등 자산 버블이 심해 피해가 클 수밖에 없다. 회복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자칫 윤석열 정부는 경제위기를 수습하다 5년을 보낼 수도 있다. 가장 걱정스러운 건 경제위기를 겪을 때마다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역시 문제는 경제다.

1997년 외환위기는 자본시장을 막 개방한 신흥국의 유동성 위기였다. 90년대 초 미국 저축대부조합 파산 사태가 진정되자 94년 연준(Fed)이 기준금리를 3%에서 6%로 가파르게 올렸다. 그러자 신흥국에서 돈이 빠져나갔다. 95년 가장 먼저 유동성 위기를 겪은 멕시코의 전통 술에 비유해 ‘테킬라 위기’로도 불린다. 이 위기는 2년 남짓 지구를 한 바퀴 돌면서 중남미, 동남아를 휩쓸고 97년 한국에 상륙했다. 수많은 기업이 문을 닫았다. 희망이 없는 듯했다.

외환위기, 신흥국만의 일시적 위기
금융위기 땐 금리인하로 위기 넘겨
지금은 전세계 위기, 금리도 올려야
세계 리더십 공백, V자 회복 힘들것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2년 만에 거의 갚고, IMF를 졸업한 것. 성장률은 98년 -5.5%에서 99년 11.3%로 V자 반등을 했다. 극적인 반전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구조조정으로 경제 체질이 좋아져서? 김대중 경제팀이 일을 잘해서? 그보다는 신흥국을 제외한 전 세계 경제가 건재한 덕분이었다. 선진국이 신흥국에 자금을 지원해줄 여력이 있었다. 세계 무역도 문제가 없었다. 94~97년 4년 경상적자가 483억 달러였다. 외환위기 이후 원화가치가 떨어지자 98~99년 616억 달러의 흑자를 냈다. 그간의 적자를 단숨에 메웠다. 재정도 튼실했다. 경기부양을 위해 재정을 동원할 수 있었다. 97년 국가채무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11.4%. 지금의 50%와는 천양지차다.

2008년 금융위기 때는 위기치고는 물가가 크게 오르지 않았다. 돈을 풀어도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 디플레이션을 걱정할 정도였다. 전 세계가 보조를 맞춰가며 금리를 낮추고, 양적완화를 단행했다. 미국은 1년간 기준금리를 5.25%에서 0~0.25%로 뚝 떨어뜨렸다. 우리도 금융위기 직후 5개월간 기준금리를 5.25%에서 2%로 인하했다. 성장률은 2009년 0.7%에서 2010년 6.5%로 V자 반등하며 금융위기를 벗어났다.

경제위기가 다시 오면 V자 반등이 가능할까? 이번은 많이 다르다. 외환위기가 신흥국의 일시적 위기였다면 이번은 전 세계의 구조적 위기다. 저금리 파티를 너무 오래 즐긴 후유증이다. 기업 펀더멘털에 비해 주가가 과도하게 올랐다. 돈이 넘치면서 부동산부터 채권·금속·에너지·명품·미술품·암호화폐까지 전 세계가 투기판이 됐다. 버블 붕괴를 걱정하던 차에 코로나 사태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에너지·식량·원자재·부품 공급망이 무너지며 물가가 치솟았다. 각국 재정은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100%를 넘나드는 등 빚더미다.

금융위기 때처럼 돈을 풀어 대처하기도 어렵다.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금리를 한동안 올려야 할 판이다. IMF는 한국의 올해 소비자물가상승률을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은 4%로 전망했다. 물가 상승으로 지갑이 얇아진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드세질 것이다. 민주노총은 10%, 한국노총은 8.5%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임금을 올리면 인상분이 제품 가격에 반영돼 물가가 더 오른다. ‘임금 발 물가상승’(Wage Push Inflation)이다. 래리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은 “높은 임금 인상률이 인플레이션을 계속 자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업은 인건비·원자재값 등 원가 상승으로 이익이 줄고, 금리 상승으로 이자 부담은 늘어난다. 임금 인상을 주저하고, 채용도 줄이려 할 것이다. 실업자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노사 분규도 빈발할 게 틀림없다. 70년대 인플레이션과 경기침체가 동시에 발생하며 전 세계를 휩쓴 스태그플레이션의 재판이다. 당시 미국은 소비자물가상승률과 실업률이 모두 10%를 넘는 악몽을 겪었다. 미국 물가는 지난달 8.3%나 치솟아 이미 70년대에 육박했다. 우리도 1,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며 74년부터 81년까지 매년 20% 안팎(최고치는 80년 28.7%)의 살인적 물가 상승과 경기침체, 그리고 사회 혼란의 악순환을 겪었다. 외환·금융위기는 한두 해 만에 V자로 회복했지만, 스태그플레이션을 벗어나려면 훨씬 오랜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

더 큰 문제는 전 세계가 리더십 공백에 빠졌다는 점이다. 미국 중심의 세계 경제가 EU·중국으로 다원화되면서 경제위기에 일사불란하게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주요국 리더들은 예전에 비해 위기를 돌파할 카리스마가 없어 보인다. 기존 정치에 대한 불신, 분노도 커지고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달 대선에서 르펜의 극우 돌풍을 간신히 잠재웠다. 연임 일성으로 “내가 좋아서 찍은 게 아니라는 걸 안다”며 통합을 약속한 것도 심상찮은 민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도 사분오열돼 사사건건 싸울 때가 아니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생기면 보수진보, 영남호남, 남녀, 노소,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