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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기득권 엘리트 카르텔부터 깨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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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윤희숙 전 국회의원

윤희숙 전 국회의원

노무현 전 대통령이 모델이었다는 2013년 영화 ‘변호인’은 1000만 명 넘는 국민이 봤다. 영화 속에서 학벌 나쁜 주인공 변호사만 빼고 판·검사 등 잘난 법조인들은 서로 형님·선배님 하면서 인맥 관리에 열중하고 인권의 가치를 비웃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것은 기득권 엘리트들이 끼리끼리 뭉쳐 이권을 나눠 먹는 행태에 분노해온 국민의 마음을 정확히 짚어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노를 먹고 자라는 포퓰리즘 정치는 어느 나라나 문제지만, 한국사회는 소위 기득권 카르텔이 훨씬 더 노골적인 데다 국민 인식은 빠르게 변하고 있어 분노 유발이 더 쉽다. 예전에는 좋은 학교 출신에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일단 기부터 죽기 일쑤였다. 그러나 전체 국민의 소양이 높아지면서 차이가 줄었을 뿐 아니라, 엘리트가 갖춰야 하는 공적 자세에 대한 사회적 요구도 높아졌다. 그런데도 공직사회 투명성이 개선되는 속도는 너무 더디다.

법조계·관계 전관예우 언제까지…
여야 적대적 공생도 갈등 부추겨

예를 들어 고위직 판·검사가 퇴직한 뒤 엄청난 수임료를 받는 것이 재판에 왜곡된 영향을 끼치는 전관예우 때문이란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다. 막대한 수임료로 재판에 영향을 주는 이유는 그보다 큰 이득이 숨어 있다는 것일 테고, 그만큼의 손해가 부당하게 상대방에 씌워질 공산이 크다. 도대체 어떤 선진국에서 이처럼 뻔한 불의를 방치하는가.

경제부처 퇴직자도 문제의 한 축이다. 대형 로펌 고문으로 자리 잡은 후 명함에 그 사실을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자신도 떳떳하지 않기 때문일 텐데, 고액의 고문료가 후배들을 난처하게 하는 일의 대가라 그럴 것이다. 후배 공직자들로서는 ‘저 선배가 언제 내 위로 다시 올지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 속에서 부지불식간에 편의를 봐주거나 공적인 결정을 왜곡할 우려가 있다. 이번 청문회에서 한덕수 총리는 현직 공무원들에게 전화한 적도 부탁한 적도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런 사회적 불신이 총리 인준 과정에서 큰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제는 왜 끊임없이 지적되면서도 고쳐지지 않을까. 문제를 해결하려는 진정성이 정치권에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매번 호통 쇼를 하거나 실효성 없는 법률안을 급조하는 것에 그친다. 진보 성향의 강준만 교수는 저서 『갑과 을의 나라』에서 전관예우는 보수와 진보 구분이 없다고 지적했다. 언변 좋은 포퓰리즘 정치가들이 국민의 분노를 양분 삼아 나라를 말아먹지 못하게 하려면 기득권 카르텔을 근절하고 사회적 불신을 불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데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결국 정치세력들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이번만 해도 그렇다. 애초 민주당은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낙마시키면 총리를 매끄럽게 인준시켜 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함으로써 총리 검증을 한낱 ‘개평’ 취급했다. 그런데도 열 시간이 넘는 청문회 호통 쇼 내내 김앤장 고문료를 문제 삼았는데, 그런 뒤에는 고위공직자로 다시 채용되는 회전문을 잠시 멈추는 입법안을 내놓는 면피 대응을 했을 뿐이다. 전관예우 전반을 어떻게 손볼 것인지는 여당도 야당도 안중에 없다. 계속 우려먹을 밑천인 것처럼 사회갈등의 진앙을 유지하는 것이다.

노동·교육·연금 등 커다란 개혁 과제가 시급할수록 공정에 대한 시대적 요구를 담아내는 것이 선결돼야 한다. 공적 과정을 비트는 엘리트를 불신하는데, 어떻게 그들이 내놓는 개혁안을 신뢰하겠나. 쇼는 제발 그만 하고, 공직자들이 퇴직한 뒤에도 공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하며 적절한 보수를 받고 공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보자. 특정인을 모욕하는 데 쓰는 에너지를 이젠 사회를 구하는 데 쏟자.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박탈감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와해시킬 수 있는 위험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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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숙 전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