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나는 너희들의 시중꾼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2면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

단풍에 곱게 물든 앞산이 차가운 가을바람에 우수수 낙엽으로 떨어져 버리면 앞산은 산등성이의 골격을 드러낸다. 현관문을 열고 우연히 바라본 앞산의 작은 바위 아래에서 검정 물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더욱 유심히 바라보자 그 작은 동물도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아마 내 편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을 것이다, 그 작은 동물은 쪼르르 한순간에 달려와 내 앞에 섰다. 검은 옷을 입은 귀여운 고양이었다. 나는 그 고양이를 보자마자 “묘야”라고 불렀다. 고양이기 때문에 ‘고양이 묘(猫)’자로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렇게 묘와 처음 만났는데, 내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나면 묘는 반드시 그 작은 바위굴 속에서 나와 나를 반기듯 바라다보았다. 내가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묘는 내 곁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내가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면 묘도 아무 스스럼없이 내 처소로 따라 들어왔다. 마치 항상 그랬듯이 묘는 소파 위로 올라가 얌전하게 앉았다. 선사가 좌선하듯.... 나는 묘의 그 조용함이 좋았다.

우연히 만난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마치 내 속을 환히 알고 있는 듯
새끼들을 살뜰히 챙기는 그 마음

너와 나는 자연스럽게 매일 만났다. 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오면 산에다 대고 “묘야, 묘야!”라고 소리쳐 너를 불렀다. 그러면 어디에 있다가 내 소리를 듣고 오는지 너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너와 나는 그렇게 정이 들었다. 나는 너에게 말을 걸었다. “묘야, 나는 너를 좋아한다”라고 말하면 너는 꼬리를 저어 화답했다. “묘야, 너도 날 좋아하니?” 하면 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또 꼬리를 저었다. “이리와” “저리 가” 하면 너는 그 말귀도 알아들었다. 너는 나의 처소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어느 날 내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너는 나의 침대에 펴 놓은 이불 중앙에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앉아 있는 너를 보고 나는 깜짝 놀라는데도 너는 미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나의 속마음을 훤히 알아차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 너는 나를 이겼다. 나는 끝내 빙그레 웃고 말았으니까.

나는 너를 어린 고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보니 너는 배가 불러오고 있었다. 배가 많이 부르다 싶더니 너는 산 중턱에다 새끼를 낳았다.

새끼를 낳고 난 너는 전에 없던 버릇이 생겼다. 맛있는 것을 주면 절대로 먹지 않고 한입 가득 물고 밖으로 나갔다. 너의 새끼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너는 종종 앞마당에서 새끼들을 품고 젖을 주곤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내가 외출하다 젖 주고 있는 너의 모습을 보면 너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새끼들을 이리저리 갈라놓고는 내 곁으로 왔다.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이, 어른 앞에서 새끼 젖을 주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되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병아리보다 더 작은 새끼들이 점점 커 가는 것은 신기했다. 서로 옷을 다르게 입은 새끼들이 이리저리 노니는 모습은 움직이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새끼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서로가 달려들고 엎치락뒤치락하며 장난을 쳤다. 그렇게 장난치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큰 재미였다. 내가 언제부터 너에게 사료를 주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나는 너의 새끼들을 위해 몇 개의 사료 그릇을 챙겨 놓고 사료가 떨어지면 또 얼른 사료를 주곤 했다. 너의 새끼들은 잘 커 가고 있었다.

내가 너의 새끼 커 가는 것을 재미 삼아 지내고 있는 동안 너는 또 새끼를 갖게 됐다. 어느 날 손님이 와서 박물관에 내려가 그 손님에게 여러 가지 설명을 하고 있는데 너는 박물관까지 따라 내려와 전에 없이 큰 소리를 내며 마치 나를 꾸짖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 손님이 떠나고 난 다음 내가 서재로 돌아와 바닥에 앉자마자 너는 나의 치마폭에다가 새끼를 낳기 시작했다.

새끼를 낳는 동안 어떠한 고통도 없는 듯 너는 삽시간에 일곱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아무 경험이 없던 나는 놀라움 속에서 너의 새끼 한 마리 한 마리를 갈무리했는데, 일곱 번째 새끼는 미처 갈무리하지 못한 사이 숨을 거두었다. 사람이 애기를 낳으면 미역국을 먹듯이 나는 새끼 일곱 마리를 낳은 네가 기운을 챙기도록 냉장고에서 너의 구미에 맞는 것을 한 상 차렸다. 너는 그것을 모두 잘 먹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 나와 보니 너의 새끼가 한 마리도 없었다. 놀란 나를 보던 너는 나를 중간 방으로 데리고 갔다. 너는 비어 있는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너의 새끼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이미 새끼를 낳으면 그것들과 어떻게 지낼 것인지 생각을 해 두었던 것 같았다.

박청수 청수나눔실천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