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원준의 미래를 묻다

대학·연구소는 혁신의 원천, 산업으로 이어져야

중앙일보

입력 2022.05.23 00:34

업데이트 2022.05.2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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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과학기술 중심 안보시대의 개막

김원준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김원준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20일 방한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첫 아시아 순방에서 일본보다 먼저 한국을, 그리고 용산보다 평택 삼성전자 반도체 캠퍼스를 먼저 찾아 기술동맹을 외쳤다. 미·중 패권경쟁과 전 세계 지정학적 대변혁기의 한복판에서 변화된 바이든 대통령의 행보는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 이제 국제 정치경제와 국가안보의 핵심 변수는 과학기술과 첨단산업, 즉 경제안보로 이동했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세계는 정치동맹·경제동맹·안보동맹을 넘어 기술동맹의 시대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과학기술이 과거 냉전시대 때와 같이 다시 안보 자산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한국은 중국의 역할을 대체할 세계 경제의 핵심 파트너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아가 반도체가 21세기 지정학의 핵심 무기로 작용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다. 그만큼 반도체 제조와 생산은 초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분야이며, 기초과학과 첨단기술이 모두 집결되는 과학기술의 총아다.

이는 반도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양자기술이나 우주기술·인공지능(AI) 등 이른바 21세기 첨단산업은 대부분 그렇다. 바이든 정부의 과학기술 참모들은 이러한 인식을 깊이 갖고 있다. 이들은 작년 국립과학재단(NSF) 내에 70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기술혁신부서를 만들어 과학과 기술의 재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원래 과학과 기술이 통합적이었던 미국의 과학기술 전통은 글로벌리제이션 시대를 거치면서 따로 떨어졌다가, 재결합하는 대전환을 하고 있고, 동시에 안보적 성격을 함께 띠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이 국가안보를 결정할 수 있는 원천(原泉)으로써의 성격 때문이다.

방한 바이든, 한·미 기술동맹 강조

과학기술이 국가안보 핵심 변수로

국내 과학기술 투자 R&D에 그쳐

연구소 연계 과학창업 활성화해야

미국의 슈퍼파워 도약, 과학-기술 통합 덕

‘휴보 아버지’ 오준호 KAIST 교수가 연구실에서 유압식 4족보행 로봇을 조작하고 있다. 오 교수가 연구 개발을 바탕으로 창업한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지난해 초 코스닥에 상장됐다. 프리랜서 김성태

‘휴보 아버지’ 오준호 KAIST 교수가 연구실에서 유압식 4족보행 로봇을 조작하고 있다. 오 교수가 연구 개발을 바탕으로 창업한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지난해 초 코스닥에 상장됐다. 프리랜서 김성태

과학과 기술이 통합적이었던 대표적인 시기가 2차 세계대전과 이후 냉전시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원자폭탄 개발), 페니실린 프로젝트, 레이더 프로젝트 모두 기초과학과 산업기술 통합의 대표적 사례다. 또한, 루스벨트 대통령의 과학고문관이었던 바네바 부시는 1945년 대통령 보고서에서 과학-기술 통합의 전통에 기반한 국가발전 전략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슈퍼파워로 도약하는 핵심적인 기반을 마련한다. 이후 수많은 기업이 기초연구 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했고, 기업 연구소들은 과학기술 개발을 통해 ‘혁신의 황금기’를 낳았다.

이처럼 과학기술 통합적 역량에 기반한 미국의 독보적인 경쟁력과 경제 대부흥은 옛소련·중국 등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경제적 패권 경쟁에서 대대적 승리를 가져오게 했고, 이들 공산권 국가들이 차례로 경제를 개방하게 되면서 전 세계는 본격적으로 세계화 시대를 열게 된다. 하지만 세계화는 결과적으로 과학기술 경쟁력에 기반한 세계 경제성장의 메커니즘을 새롭게 바꾼다. 즉,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방으로 시작된 30억 명에 가까운 저임금 노동인력의 막대한 초과공급이 시작되면서, 세계는 노동생산성에 기반한 경제성장의 대부흥기인 ‘Great Sweet Window(인류 역사상 GDP가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간)’를 맞게 된다. 1980~2000년대에 전세계 기업들은 저임금 노동인력 중심의 중국과 아시아로 공장을 옮기고, 촘촘한 글로벌 공급망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이러한 세계화의 패러다임 하에서 각국은 가격 중심의 글로벌 초경쟁 시대로 진입하고, 기업의 과학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위험성 높은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기업에 부담이 되기 시작했고, 중장기 파괴적 혁신을 가져오는 기초인 ‘과학’에 대한 투자와 산업 경쟁력을 위한 ‘기술’이 점차 디커플링, 즉 탈(脫)동조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AT&T의 벨연구소, 제록스의 파크 연구소 등 미국 기초연구에서 두드러진 연구를 수행했던 많은 기업 연구소들이 축소되거나 사라진 것도 이때다. 그리고 기업들은 과학적 연구를 대학이나 연구 전문기관에 아웃소싱하는 협력으로 대체했다. 즉, 과학기술에 대한 분업화 구조가 보다 명확해지면서 ‘혁신의 분업화’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오픈 이노베이션’이라 부른다.

금융위기 이후 과학-기술의 리커플링 현상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로 다시금 세계경제의 메커니즘이 바뀌기 시작한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빠른 자본축적과 이로 인한 노동임금의 상승은 저임금 노동생산성 기반의 글로벌 성장 원천을 빠르게 소진시켰다. 천인계획 같이 미국의 탄탄한 과학기술 연구 및 교육 시스템의 혜택을 받은 중국 인재들의 고국 회귀 등은 미국으로 하여금 중국몽(中國夢)에서 깨어나게 하는데 충분했다. 달콤했던 중국과 아시아 중심의 저임금 노동기반의 꿀단지가 이제는 소진되고, 어느새 본인의 주머니까지 털릴 처지가 되어 가고 있음을 미국은 깨달은 것이다. 미국이 가격 중심의 초경쟁에 신경 쓰는 동안, 중국은 과학기술 혁신역량을 빠르게 키워나갔고, 이제는 미국의 혁신역량을 위협하는 국면에 이르렀다. 첨단과학기술 경쟁력이 다시금 중요해지는 시기로 회귀한 것이다. 이른바, 과학과 기술의 리커플링(re-coupling·재동조화)과 함께 R&DP(연구개발+protection) 중심의 과학기술 안보라는 글로벌 패러다임으로의 변화다.

변화의 소용돌이 속 한반도를 돌아본다. 한국도 과학과 기술의 통합적 혁신으로 성장한 대표적인 국가이다. 1966년 KIST를 설립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뛰어난 한인 과학자들을 불러모았다. 지금 한국을 이끌어가는 반도체·자동차·조선·중공업·화학·철강 등 주력 산업들이 모두 이때 KIST의 과학과 기술의 통합적 전략에 의해서 기획·개발되었고, 기업으로 이전되어 지금의 한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도 산업화를 지나 산업 고도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과학과 기술의 디커플링이라는 글로벌 변화를 피할 수 없었다. 과학의 연구개발 포트폴리오와 산업의 연구개발 포트폴리오의 간극이 크게 벌어지면서 막대한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는 상당부분 연구개발만으로 끝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연구와 기술혁신 이원화

기존 연구결과에 의하면 한국 우수연구자들의 연구 성과 중 상당부분이 외국기업의 특허 기술로 출원되고 있다. 외국기업이 우리 기술로 한국 기업들과 경쟁하는 상황인 것이다. 한국은 우수한 연구결과를 흡수할 산업이 없고, 기업은 자체적인 R&D 투자로만으로 기술혁신을 해내야 하는 선순환적이지 않고, 단절되고 이원화된 혁신생태계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과학기술 기반 창업 제도와 문화가 적절히 마련되어 있지 않은 것에 원인이 있기도 하다. 한국은 경제성장의 잠재력을 계속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바이든의 첫 순방지로 삼성 반도체 공장 방문은 한국에 새로운 혁신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과학-기술의 리커플링이다. 대학과 연구기관의 연구개발 포트폴리오와 산업의 기술개발 포트폴리오를 연계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AI·반도체·우주항공·양자·바이오 등 전략 분야, 신성장 분야를 중심으로 한국 내 뿐만 아니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대학·기업들과의 메가 프로젝트를 추진해 대대적인 리커플링을 추진하여 글로벌 혁신 생태계와 연계해야 한다. 신성장전략 분야를 중심으로 민관협력 연구개발에 대한 대폭적인 세금 공제의 확대 등이 필요하다.

둘째, 한국 혁신체계의 디커플링은 과학기술 인력의 수요공급 불일치에서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다. 반도체 산업에서 대학이 배출하는 전문인력은 요구되는 인력 규모의 20%에도 못 미친다. 소프트웨어 분야도 앞으로 5년 동안 약 10만 명 이상의 전문인력이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산업 분야의 인력공급 부족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의 규제와 자체적인 혁신의 부족은 이러한 과학-기술의 디커플링을 가속화하고 있고,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잠식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신성장 전략 분야를 시작으로 대학 교원과 학생정원의 자율적·전략적 운영이 시급하고, 전통적인 학과의 벽을 허무는 등 자체적인 혁신이 요구된다.

셋째로 요구되는 한국의 혁신은 과학창업의 활성화다. 대학과 연구기관은 혁신의 원천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2018년까지 나온 기업이 총 4만개, 일자리는 500만개에 이른다. 국내에선 글로벌 사업화로 연계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뛰어난 연구개발 성과들은 외국기업들의 자산을 불려주고 있다. 이런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학과 연구기관의 과학창업을 적극적으로 활성화해 과학과 기술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직접 만들어 나가는 과감한 도전이 필요하다. 국내 창업 생태계를 개혁한 ‘혁신성장펀드’ 모델을 과학기술 분야에 적용해 과학 산업화를 위한 대규모 모태펀드를 조성하고, 실패에도 박수치는 새로운 문화를 육성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제시한 한·미 기술동맹은 과학-기술 리커플링 시대, 과학기술 안보시대를 함께 선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과감한 시스템 개혁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김원준 KAIST 기술경영전문대학원장

Innovation La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