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필규의 아하, 아메리카

美 3명 중 1명 동감한다…음모론 '대체이론' 키운 언론인 수법

중앙일보

입력 2022.05.2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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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김필규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김필규 워싱턴특파원

#1.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 수백 명의 백인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을 이끌던 로버트 리 장군 동상의 철거를 막기 위해 온갖 극우 단체가 모였다. 남부연합이나 나치 깃발을 들고 있던 이들이 외친 구호는 “너희는 우리를 대체할 수 없다”였다.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맞불 시위대와 충돌이 빚어졌고, 급기야 한 백인우월주의자가 차량을 몰고 돌진하면서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를 향해 차량이 돌진해 1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쳤다. [AP=연합뉴스]

2017년 8월 미국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대를 향해 차량이 돌진해 1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쳤다. [AP=연합뉴스]

폭스뉴스의 진행자인 터커 칼슨은 '인종 대체이론'을 '유권자 대체이론'으로 각색해 미국 유권자 사이에 널리 퍼뜨린 장본인으로 지목된다.[AP=연합뉴스]

폭스뉴스의 진행자인 터커 칼슨은 '인종 대체이론'을 '유권자 대체이론'으로 각색해 미국 유권자 사이에 널리 퍼뜨린 장본인으로 지목된다.[AP=연합뉴스]

#2. 지난해 4월, 폭스뉴스 진행자 터커 칼슨이 방송에 나와 말했다.

“민주당이 현재의 유권자들을 새로운 사람들, 제3세계에서 온 순종적인 이들로 대체하려고 한다.”
정치인도 이런 주장에 가세했다. 공화당의 브라이언 바빈 하원의원(텍사스)은 “민주당은 국경을 열려고 한다. 그들의 전략은 미국 유권자를 대체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14일 뉴욕주 버팔로의 한 슈퍼마켓에서 총기를 난사해 흑인 10명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페이튼 젠드런은 범행 전 대체이론의 영향을 받은 선언문을 작성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14일 뉴욕주 버팔로의 한 슈퍼마켓에서 총기를 난사해 흑인 10명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페이튼 젠드런은 범행 전 대체이론의 영향을 받은 선언문을 작성했다. [로이터=연합뉴스]

#3. “역사상 전례 없는 수준의 침공이다. 수백만 명이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쏟아져 들어온다. 각 주와 기업이 불러들인 이들이 재생산에 실패한 백인을 대체하고 있다.”
지난 14일 뉴욕주 버펄로에서 총기를 난사한 페이튼 젠드런이 쓴 선언문 내용이다. 유대인·이민자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심이 드러난다. 그는 "팬데믹 초기 할 일이 없어 인터넷 사이트를 보다가 이런 이론을 접하고 분노하게 됐다"고 했다. 돌격소총과 방탄복으로 중무장한 그에게 이날 슈퍼마켓에 있던 흑인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대체이론(Replacement Theory)’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들이다. 변방에서 일부 음모론자들이 속닥이던 이야기는 어느덧 제도권 정치인의 입을 거치더니, 극단적인 폭력 사태까지 야기했다.

사상의 기원은 프랑스의 작가 르노 카뮈(75)다. 대체이론이라는 말도 2011년 그가 쓴 책 이름에서 따왔다. 글로벌 엘리트 집단이 북아프리카와 중동 출신 이민자를 대거 받아들여 프랑스를 비롯한 백인 중심의 유럽 인구·문화를 대체한다는 주장이다.

유럽에선 ‘유럽의 아랍화’를 뜻하는 ‘유라비아’라는 말로 공포감을 조성했다. 미국에 건너와선 ‘백인 학살(White Genocide)’이라는 음모론이 더해졌다. 유대인이 일부러 이민자를 유입시켜 유색인종 인구를 늘리고, 인종 간 결혼을 통해 백인 문화를 소멸시키려 한다는 이야기다.

확산의 계기를 만든 장본인으로 폭스뉴스의 인기 진행자 터커 칼슨이 지목된다.
백인 유권자 수를 감소시키는 게 민주당 이민 정책의 목적이라며 인종 대체이론을 ‘유권자 대체이론’으로 재포장한 것이다. 조너선 그린블랫 반명예훼손연맹(ADL) 대표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칼슨이 ‘백인 학살’ 같은 표현은 빼면서 이 음모론을 많은 미국인의 구미에 맞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유권자 대체이론은 선거를 앞둔 정치인들의 입맛에도 맞았다.
공화당 하원 서열 3위인 엘리스 스테파닉 의원(뉴욕)은 지난해 9월 “급진 민주당원들이 선거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 1100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받아들여 현재 유권자를 전복시키고 워싱턴에서 영구적인 다수당을 차지하려 한다”는 광고를 내보내 논란이 됐다.

이에 동조하는 미국인들의 수도 적지 않다.
지난 9일 AP-NORC가 공개한 여론조사(미국 성인 남녀 4173명 대상) 결과, 32%가 “특정 세력이 본토 미국인 유권자를 이민자로 대체하려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민자들 때문에 본토 미국인이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는 이들도 29%였다.
조사를 담당한 시카고대 여론연구센터(NORC)는 “모두 대체이론이 주장하는 핵심 내용”이라면서 지난 10여 년 동안 미국인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분석했다.

대체이론은 투표소에서 끝나지 않고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져 더 큰 문제다.
2018년 11명의 희생자를 낸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 총격 사건의 범인 로버트 바우어스는 이민자를 ‘침략자’로 부르며 유대인에 책임을 물었다. 이듬해 엘파소 월마트에서 총기를 난사해 20명을 죽게 한 패트릭 크루시어스 역시 히스패닉이 정부를 장악할 것이라며 인종이 섞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선언문을 남겼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버펄로 총격사건 사흘 만인 지난 17일 현장을 직접 찾았다. “곳곳에 만연해 있는 백인우월주의에 침묵하는 것도 공범”이라며 “인종차별적인 대체이론이라는 거짓을 거부해야 한다”고 했다.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대체이론을 주장하는 공화당을 압박하기 위한 발빠른 행보라는 분석도 나온다.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 대체이론을 믿는 경우가 42%(AP-NORC 조사)나 된다. 이번 선거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석 달 전 집회에서 “백인들은 그동안 선 뒤로 물러서기를 요구받았다”며 대체이론을 끄집어냈다.

샬러츠빌 폭동에 대한 소송을 이끌었던 비영리단체 ‘미국을 위한 통합 우선(IFA)’의 에이미 스피탈닉 국장은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최근의 폭력 사태는 “백인우월주의적인 대체이론이 일반화되며 나온 불가피한 결과”라며 “선거에서 뽑힌 공화당 의원과 지도부가 이 치명적인 음모론을 증폭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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