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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위 '백혈병 우정'…'소년급제' 희도와 승보의 16년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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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그린을 읽는 장승보(왼쪽)와 정희도. [사진 KPGA 민수용]

함께 그린을 읽는 장승보(왼쪽)와 정희도. [사진 KPGA 민수용]

“아버님, 희도는 제가 살릴게요.”

거포와 독사는 어릴 때부터 단짝이었다. 정희도(25)는 눈매가 매섭고 쇼트게임을 잘한다고 해 별명이 ‘독사’, 장승보(26)는 드라이버샷을 멀리 쳐 별명이 ‘거포’였다.

골프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교 3학년 인천 송도연습장에서 만났고 이후 "잠자는 시간 빼고 함께 있었다"고 할 정도로 친했다. 부모님도 형제처럼 지낸다. 장승보의 아버지 장정기씨는 삼미슈퍼스타스 창단 멤버인 야구 선수 장정기(64)씨다.

둘은 골프를 잘했다. 정희도는 고 2때 한국프로골프(KPGA) 정회원에 합격했다. 골프계에서 소년 급제로 통한다,

장승보는 국가 대표 기둥이었다.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 위해 프로 전향을 미뤘다.

이후 기대만큼 잘 안 풀렸다. 장승보는 아시안게임에서 부진, 동메달에 그쳤다. 프로에 와서는 퍼트 부진과 손목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장승보는 지난해 KPGA 평균 거리 2위(312야드)였지만 상금순위는 120위였다. Q스쿨을 거쳐 올해 출전권을 다시 따야 했다. 올해 시드 순위 119번으로 풀필드 대회가 아니면 참가하기 어렵다.

정희도는 지독하게 고생했다. 프로가 된 후 스윙을 고치려다 드라이버 입스에 걸렸다. 소년 급제자가 지옥으로 빨려들었다.

그는 1부 투어에서 뛴 적은 없고 2014년 2부 투어서 기록한 공동 30위가 가장 좋은 성적이다. 공이 안 맞아 정진우에서 정희도로 개명도 했다.

정희도는 군에 가 마음을 비운 후 새로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입대했다가 2020년 제대 후 투어 복귀를 준비했다.

지난해 항암치료를 받을 때 정희도. [정희도 제공]

지난해 항암치료를 받을 때 정희도. [정희도 제공]

그 해 연말 정희도는 몸에 열이 나고 식은땀을 흘려 응급실에 갔다.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코로나 19 감염증 와중이라 혈청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정희도의 아버지 정대영씨가 “우리 희도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장승보에게 하소연했다. 장승보는 자신이 친구를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정대영 씨에 의하면 항암치료 한 번에 혈청이 30개씩 필요하고, 피를 뽑는 데 3시간이 걸린다. 다들 코로나 감염 위험을 걱정할 때다. 선수들은 혈청을 뽑다 컨디션이 나빠질까 봐 부담스러워 할 만했다.

장승보는 SNS로 알리고 동료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O형 혈청을 구했다. 많은 선수가 도왔다. 장승보의 아버지 장정기 씨는 “승보와 희도가 워낙 주위 사람들에게 잘 해 선수들이 도와준 것 같다”고 말했다.

정희도는 3번의 항암 치료를 무사히 마쳤고 지난해 8월 동생으로부터 골수이식을 받았다.

정희도는지난 봄스릭슨 투어(2부 투어)에 출전했다.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없을 때라 가발을 쓰고 나갔다.

그는 “수술 후 열다섯 걸음 정도 걸으면 힘들고 숨이 찼다. 그런데 골프 칠 때는 몸이 안 아프더라. 잔디를 밟으면 몸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골프 연습을 하면서 다리의 근육이 다시 생긴 것 같다”고 했다.

19일부터 22일 경남 거제 드비치 골프장에서 열린 KPGA 데상트 코리아 먼싱웨어 매치플레이에서 장승보의 가방을 정희도가 멨다. 1부 투어를 경험해보지 못한 희도의 꿈이자 친구와 함께하고픈 승보의 꿈이기도 했다.

장승보(왼쪽)와 정희도. [사진 KPGA 민수용]

장승보(왼쪽)와 정희도. [사진 KPGA 민수용]

120명이 나온 예선에서 11위로 출전권을 딴 장승보는 64강, 32강전에서 승리 8위에 올랐다. 2020년 군산CC 오픈 공동 7위 이후 장승보의 가장 좋은 성적이다.

그린을 잘 읽는 정희도가 도움이 됐다. 김봉섭과의 경기 6번 홀에서 장승보는 “오르막인데도 그 정도 보고 치면 되는 거야”라고 물었다. 정희도는 “맞아 딱 그 자리.” 장승보의 15걸음 버디 퍼트가 쏙 들어갔다.

장승보는 “희도와 함께 경기하니까 도움도 받지만, 여유도 생겼다. 샷실수가 나와도 화가 안 난다”고 했다.

캐디가 잘 따라오지 못하거나 가방 무게를 줄이려고 물건을 빼면 선수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 장승보는 “친구끼리는 그런 것 따지지 않는다”고 했다.

정희도는 내년 1부 투어를 목표로 훈련하고 있다. 집안 어른들은 재발 우려가 높아 반대한다. 정희도는 “좋아하는 것을 해야 건강에도 좋다”고 말했다.

갈 길은 멀다. 그는 팔에 성경 욥기 23장 10절을 새겨 다닌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는 글귀를 히브리어로 적었다.

정희도는 “큰 위기를 겪고 나니 예전처럼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고 운동할 수 있게 됐다. 타이거 우즈가 교통사고 후에도 재기해 경기에 나서는 것을 보고 영감도 얻는다”고 했다.

거포와 독사는 1부 투어에서 우승 경쟁도 하고 싶다. 미국 콘페리투어(2부 투어)에서 뛰면서 내년 PGA 투어 출전권을 확보한 김성현도 단짝 친구 중 하나다.

장승보는 “성현이가 미국에서 보니 여기도 똑같은 사람들이 운동하더라. 우리도 경쟁할 수 있고 다들 와서 함께 뛰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거제=성호준 골프전문기자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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