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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회사 때려치우고 양말가게 차린 디자이너…"방망이 깎는 노인처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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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양말만큼 간편하게 개인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아이템도 없습니다. 소득과 취향의 수준이 동반 상승하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뚜렷해 졌습니다. 매번 흑백의 묶음 양말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갖 색깔 온갖 디자인의 양말을 다 갖고 있으면서도 '신을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만큼 시장이 넓고 다양해졌다는 뜻이겠죠. 이제 양말은 패션이나, 팬시, 그래픽이 아닌, '그 모든 것'이 됐습니다.

12년 전, 이런 양말에 빠져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게임회사 사원증을 내려놓고, 양말 가게를 차린 디자이너가 있습니다. 성태민 삭스타즈 대표 얘기입니다. 그는 왜 게임 대신 양말을 택했을까요? 디자이너의 욕구와 사업가의 전략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춰 왔을까요? 성 대표를 만나 직접 물어봤습니다.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 “디자이너 CEO의 세계” 1화 중 일부입니다.

삭스타즈는 양말을 ‘아트 피스’로 보고 있어요. 몇몇 사람들은 기껏 양말인데 저렇게까지 하냐고 하지만, ‘저는 이렇게까지 합니다’라고 말하죠.  

경기도 파주 본사에서 만난 성태민 삭스타즈 대표. ⓒ최지훈

경기도 파주 본사에서 만난 성태민 삭스타즈 대표. ⓒ최지훈

돌연 양말가게를 창업한 게임회사 신입 디자이너

Q. 게임 회사 디자이너였죠. 당시 중요하게 생각한 건 뭐였나요?
게임을 아주 좋아했고, 여전히 좋아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UI/UX 디자이너로 취직했어요. 게임에 사용되는 인터페이스와 그래픽 디자인을 하는 일이었죠.

그 과정에서 제일 심혈을 기울였던 부분은 적당히 대중적인 감을 유지하는 거였어요. 게임 디자인은 직관적이고 친숙해야 해요. 디자이너들이 봤을 때는 타당하지만, 유저들에게는 너무 진보적일 수 있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기준을 낮춰 촌스러워져도 안 되죠. 그래픽도 그렇지만 특히 UI 측면에서 너무 앞서 나가면 어려워져요. 그래서 항상 13세 정도의 타깃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의 난이도를 염두에 두고 작업했어요.

Q. 당시의 GUI*라면 픽셀 단위로 하나하나 작업했으니 매우 어려웠겠어요.
정말 그랬죠. 버튼 사이즈가 19픽셀이냐 20픽셀이냐는 아주 큰 차이거든요. 요즘은 UI가 많이 단순해졌고 웹 코딩으로 구현하는 방식이 많아졌기 때문에 이전 같은 그래픽 작업을 거의 안 할 거예요.

*Graphical User Interface: 화면의 아이콘, 스크롤 바 등의 그래픽을 기획하고 만드는 일.

Q. 그런데 입사 1년 만에 퇴사한 이유가 뭔가요?
저는 꿈을 이룬 사람이었어요. '개천에서 용 났다'는 표현이 딱 맞았죠. 김해에 있는 지방대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기업에 취직했으니 학교에 현수막까지 걸릴 정도였어요. 당시 회사가 삼성동 아셈타워에 있었어요. 봉은사 앞에서 청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고 스무디킹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있는 사람, 베테랑 IT 디자이너처럼 머리를 빡빡 밀고 한국형 실리콘 밸리의 중심에 서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바로 저였어요. (웃음)

한껏 들떠서 반포에 자취방을 구하고 인테리어에 투자하려고 대출까지 받았어요. 스물여섯 살의 성공한 싱글남이었달까요. 이제 막 시작될 환상적인 삶에 흠뻑 젖어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꿈에 그리던 회사에 들어갔는데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매일 받았어요. 저는 노력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따라와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게다가 7, 8년 차쯤 되는 선배들을 보면 일보다 정치가 더 중요해 보였어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Q. 대출도 있는 데다가 많은 이들이 꿈꾸는 삶인데, 퇴사하기 쉽진 않았을 텐데요. 보통은 못해도 3년은 버텨보자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포기가 빠른 스타일이에요. 아니다 싶으면 빨리 접어요. 그런데 삭스타즈는 달라요. 회사에 다닐 땐 제가 잘못된 게 아니라 IT란 업계와 제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컸거든요. 반면 양말 디자인으로 넘어와선, 양말이라는 아이템에는 문제가 없는데 제 역량이 부족해서 힘들었던 경험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것만큼은 끝까지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죠.

Q. 픽셀을 디자인한단 점에서 양말과 게임 디자인의 비슷한 점이 있을 듯해요.
그렇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러네요. 우선 스케치를 하고,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 나오면 양말 칸에 맞게 올려놓고 픽셀링을 해요. 기계가 인식해서 양말을 짤 수 있도록 도안을 화면에 점으로 찍어서 표현하는 건데, 80년대 게임 팩맨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거예요.

기계나 실의 종류에 따라서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고, 컴퓨터 화면에서 본 것과 실제로 짰을 때의 느낌도 달라요. 그 차이를 샘플링 전에 머릿속에서 줄일 수 있는 내공이 바로 경력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제 경우에는 5년 차부터 가능했어요.

Q. 양말 디자인에서 기피하는 패턴이 있나요?
사선 디자인은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시각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스트레치 폭이 안 나와서 신을 때 불편해요. 양말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착용감도 많이 고려해야 하거든요.

성태민 대표는 ″컴퓨터 화면과 실제 양말의 디테일 차이를 줄일 수 있는 능력은 내공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삭스타즈

성태민 대표는 ″컴퓨터 화면과 실제 양말의 디테일 차이를 줄일 수 있는 능력은 내공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삭스타즈

직관과 현실이 손잡고 만드는 기회

Q. 여러 아이템 중 왜 양말로 창업하셨어요? 12년 전이면 사람들이 양말에 관심이 없을 때잖아요.
사실 지금도 관심이 많다고 하긴 힘들어요. 당시에 일본이나 유럽에 가면 좋은 양말 브랜드나 편집숍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는 유일하게 닥스나 인타르시아 정도였고요. 분명히 선례가 있는데 국내 양말 브랜딩이 너무 뒤떨어져 있으니 직접 해봐도 되겠다고 생각한 거죠.

Q. 시기상조였네요.
빨라도 너무 빨랐죠. 스마트폰이 없는데 앱을 개발하겠다고 한 것처럼요. 당시에 어떤 책을 읽고 '내 비즈니스를 사랑해주는 천 명의 소비자만 있으면 된다'는 개념에 심취해 있었어요.

천만 명이 아니라 확실한 천 명을 끌 수 있는 사업을 하고 싶었어요. 그 정도는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마음으로요.

Q. 그때의 삭스타즈와 지금의 삭스타즈는 아주 다른 브랜드일 것 같은데요.
오히려 지금이 초기 형태와 비슷해요. 초창기의 웹페이지를 보면 현재 삭스타즈 자사 몰과 많이 닮아 있어요. 드디어 하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오래된 브랜드를 소개하고 직접 제작도 하고 양말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전하는 일요. 7년 차 정도 되어서야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는데, 그 전에는 일반 온라인 쇼핑몰에 더 가까웠어요. 어설픈 마케팅의 결과랄까요. 그동안 참 재미가 없었는데 이제 좀 재미있네요.

Q. 그렇게 재미없는 일을 어떻게 계속했나요?
생계를 유지하려면 해야 했죠. 그래서 부끄러운 점도 많아요. 12년간 양말 가게를 해왔다고 하면 포기하지 않고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그런 그림과는 전혀 달라요. 지금은 차마 팔 수 없을, 공장에서 남는 실로 짠 싸구려 제품 같은 것도 팔았어요. 현실과 타협을 아주 많이 했던 때가 있었죠.

Q. 입점이나 협업도 쉽게 하지 않아 ‘거절왕’이란 별명이 붙었다고요.
괜찮은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거를 때가 있어요. 모든 게 이상하리만치 순항이면 조금 불안해지거든요. 많은 일이 한꺼번에 진행되면 어느 순간에는 일에 끌려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요. 그럴 때 브레이크를 걸죠. 예를 들어 당장 다음 달 생산 계획이 세워져 있는데 새로운 기회가 들어왔다고 덥석 잡아버리면 다 감당할 수가 없어요.

욕심을 부리면 탈이 나요. 제대로 하고 싶다면 둘 중 하나는 멈춰야 하죠. 직접 계획한 일들은 그 변수까지 저의 통제 하에 있지만, 낯선 기회에는 통제되지 않는 변수들이 너무 많아요.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서울의 삭스타즈 청담 쇼룸 모습. ⓒ삭스타즈

서울의 삭스타즈 청담 쇼룸 모습. ⓒ삭스타즈

Q. 키를 쥐고 있다는 게 중요하군요. 혹시 대표님의 그런 계획을 모두 내려놓고 잡았던 기회도 있었나요?
2019년 4월에 오픈한 청담 쇼룸이 그랬어요. 자본도 모자랐고 확신도 없었는데 모든 걸 감수할 만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어요. 날씨가 따뜻해지는 4월은 양말 브랜드로는 비수기의 시작인 데다 쇼룸 위치마저 외져서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만한 게 없었거든요. 다만 위층의 카멜 커피가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고, 월세가 저렴하고 권리금도 없어서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결국 삭스타즈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된 배경이 바로 청담 쇼룸이에요.

Q. 디자이너여서 그런지, 아니면 개인의 성향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이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요.
어느 정도는 '촉'에 의해서 움직이는 게 맞아요. 너무 계산된 대로만 하면 사업이 성장하지 못해요. 유지는 할 수 있겠지만 같은 상태에 머물면 결국 도태되고 말아요. 사업은 '성장이 곧 유지'거든요. 세상은 점점 커지고 물가도 오르잖아요. 매년 20~25% 정도는 커야 변함없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요.

"삭스타즈는 양말을 '아트 피스'로 봅니다"

Q. 사실 양말이라는 아이템 자체는 굉장히 대중적인데, 삭스타즈의 브랜딩은 그에 상반되는 느낌이에요. 브랜딩에 있어서 특히 고려하는 부분이 있나요?
먼저는 양말이 돋보이도록 노력하고, 진지한 태도로 목소리를 내려고 해요. 양말이기에 반드시 귀엽고 캐주얼해야 할 이유는 없거든요. 너무 진지하면 옆에서 뭐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방망이 깎는 노인에게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몇몇 사람들은 기껏 양말인데 저렇게까지 하냐고 하기도 하지만, '저는 이렇게까지 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후략)

LDCD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 상상 속 양말 디자이너의 방을 예술적으로 구현했다. ⓒ삭스타즈

LDCD에서 진행한 팝업스토어. 상상 속 양말 디자이너의 방을 예술적으로 구현했다. ⓒ삭스타즈

※ 이 기사는 ‘성장의 경험을 나누는 콘텐트 구독 서비스’ 폴인(fol:in)의 “디자이너 CEO의 세계” 1화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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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전문 인터뷰어 룬아 작가와 함께 디자이너 출신 대표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이 이끌고 있는 삭스타즈·볼드피리어드·mtl 등 10년차 내외 브랜드들의 브랜딩 전략과 생생한 ‘취향 저격’ 노하우를 담았습니다. 예비 퍼스널브랜더와 기업 브랜딩 담당자라면 주목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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