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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asy man" 이렇게 盧 부른 부시…한미정상회담 악몽의 순간들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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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대중 대통령. 백악관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전 악수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고(故) 김대중 대통령. 백악관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부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 전 악수하고 있습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정상회담은 실패할 수 없다.”  

외교가에 회자되는 금과옥조 같은 말입니다. 실패한 정상회담은 물론 세계 외교사에 차고 넘칩니다. 이 말은 정상회담은 실패를 허용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정상회담 한 번을 위해 수차례의 실무 회의가 이뤄지고 의전과 경호 역시 최고 수준으로 이뤄지죠. 정상회담은 일종의 세리모니, 혹은 퍼포먼스에 가깝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기억하시는지요. 신임 영국 총리 휴 그랜트가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 모욕적인 양보를 강요받고, 썸을 타던 여성 비서관에게 그 대통령이 치근덕거리는 모습을 본 뒤, 기자회견에서 열변을 토하던 장면이 나옵니다. 대략 “영국은 비틀스와 대문호 셰익스피어,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의 왼발, 오른발 등 수많은 자산을 가진 나라”라면서 “강압적으로 나오는 (미국같은) 국가와는 특수관계(special relationship, 영국과 미국이 동맹을 강조하기 위해 쓰는 표현)을 지속할 수 없다”고 일갈하는 장면이죠. 시원하긴 하지만, 실제로 이렇게까지 실패한 정상회담을 하는 정치인은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췄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영미 정상회담 기자회견 장면.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영미 정상회담 기자회견 장면.

영화 아닌 현실에서도, 국가 정상들도 사람입니다. 서로의 합(合)이 잘 맞지 않을 경우가 많죠. 특히 한 의제를 두고 첨예하게 국익 또는 의견이 대립할 경우엔 정상회담은 숨 막히는 협상의 최전선이 됩니다. 한국 정상회담 역사에선 주로 북한과 주한미군 등 이슈를 놓고 미국과 이념 스펙트럼 대척점에 서 있는 정권들이 들어선 경우가 특히 그랬죠. 고(故) 김대중 대통령과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한ㆍ미 정상회담은 항상 지도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화제였습니다. 당시 미국 백악관의 주인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었죠. 햇볕 정책 등 북한을 포용하는 입장이었던 김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이 마주해야 했던 미국 대통령이 “북한은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했던 인사라는 점은 꽤나 공교롭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 전 대통령의 한ㆍ미 정상회담에서 유독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This man”과 “easy man”입니다. 백악관 공식 기록과 당시 한국 언론 보도를 종합한 상황은 이렇습니다.

환히 웃는 두 정상. 부시 대통령이 친근함을 표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의 팔을 잡은 것 같고도 한국 일각에선 논란이 일었었습니다. [중앙포토]

환히 웃는 두 정상. 부시 대통령이 친근함을 표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의 팔을 잡은 것 같고도 한국 일각에선 논란이 일었었습니다. [중앙포토]

#1. 2001년 3월 7일(현지시간). 부시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마친 뒤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김 대통령도 함께 했다. “김 대통령을 백악관 집무실로 초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상당히 좋은 토론(a very good discussion)을 가졌습니다. 우리 두 국가 간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confirmed)했죠. 많은 주제에 대해 얘기를 했습니다. 그 주제들에 대한 여러분의 질문을 기쁜 마음으로 함께 받겠습니다만, 먼저 북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이 분(this man)의 리더십을 제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로즈가든에 함께 자리한 모습. [중앙포토]

2003년 5월 노무현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이 로즈가든에 함께 자리한 모습. [중앙포토]

#2. 2003년 5월14일. 부시 대통령은 이번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로즈가든에 섰다. 기자들을 향한 부시 대통령의 일성은 이랬다. “우리의 좋은 친구인 한국의 대통령을 워싱턴DC와 집무실로 초대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이 만남을 정말로 학수고대(really looking forward to) 했습니다. 우린 수차례 전화통화를 했고 중요한 문제를 다뤘고, 이젠 중요한 문제를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고 다룰 기회를 가졌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이 이야기하기에 참 편한 상대(easy man to talk to)라는 점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의견을 매우 명확하게 표현했고, 이해하기가 쉬웠습니다.”

문제가 느껴지시나요. 지금은 그다지 없어보이죠. 그러나 당시에 이 발언은 한국에서 엄청난 역풍을 맞았습니다. 대통령들의 지지자들 사이에서 “부시 대통령이 우리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주장이 불같이 일었죠. 우선 김대중 대통령을 연장자임에도 “this man”이라고 부른 것이 하대와 결례 논란이라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easy man”이라는 단어 선택이 “쉬운 남자”라고 1차적으로 해석되면서 역시나 하대 논란을 불렀습니다. 과연 그랬을까요. 제가 코리아 중앙데일리 기자 시절, 미국인 에디터들이 외려 제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게 왜 하대 논란을 일으킨 건지 설명해달라”라고 말이죠.

부시 대통령의 'easy man' 녹취록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백악관 홈페이지. [the White House]

부시 대통령의 'easy man' 녹취록을 그대로 기록해놓은 백악관 홈페이지. [the White House]

김 대통령에게 ‘this’라는 지시형용사를 쓴 것은 바로 곁에 있는 이를 지칭했던 것이고, 노 대통령에게 ‘easy’라는 단어를 쓴 것은 관용어 ‘easy to talk to’의 일부일 뿐이라는 게 그들의 설명이었죠. 당시, 답이 궁해서 난처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한국에선 ‘easy’라는 표현을 두고 일부 칼럼에서 “정조 관념이 없는 여성을 부를 때 쓰는 표현”이라는 지극히 조선시대 적인 주장도 나왔었죠.

부시 대통령이 로즈가든 기자회견을 마치고 노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중앙포토][

부시 대통령이 로즈가든 기자회견을 마치고 노 대통령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중앙포토][

노 대통령의 외교ㆍ안보 책사였던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저서 『칼날 위의 평화』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위의 표현과 관련한 것은 아니고, 부시 대통령과의 이견에 관한 것이었죠.
“부시는 일방주의와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네오콘 대통령 답게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며 호소하는 이 작은 동맹국 지도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노 대통령 서거 뒤, 그의 초상화까지 그려서 봉하마을을 찾은 이가 누구였습니까. 부시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이 그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 [노무현재단 제공]

부시 전 대통령이 그린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초상화. [노무현재단 제공]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녀 노서은 양과 조지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3일 오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진행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손녀 노서은 양과 조지 워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23일 오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에서 진행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조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에 도착해 분주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나라가 통째로 이사를 가지 않는 이상, 한반도의 운명은 외교에 상당부분 달려 있습니다. 아무쪼록 불필요한 논란 없이, 알맹이 있는 외교가 이뤄지길 국민의 한 사람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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