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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티크·빈티지, 마음에 쉼표를 찍는 추억의 신전이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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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9호 26면

POLITE SOCIETY

매주 일요일에만 열리는 프로방스의 ‘릴 술 라 소르그(L’Isle-sur-la-Sorgue)’ 노천 앤티크 시장.

매주 일요일에만 열리는 프로방스의 ‘릴 술 라 소르그(L’Isle-sur-la-Sorgue)’ 노천 앤티크 시장.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기자재실에 비디오(VHS) 플레이어가 딱 한 대 남아있다. 그리고 나는 그 기계를 사용하는 유일한 교수다. 수업 중에 직접 비디오를 편집한 영화의 장면들을 주제별로 보여주며 강의를 한다. 한 번은 연결된 화면이 흐릿하게 잘 나오지 않아서 무심코 손바닥으로 TV 옆면을 탁 쳤는데, 그걸 본 학생들은 포복절도 했다. 아주 예전 아버지나 할아버지의 행동이 떠올랐겠지만, 그래도 그 목적은 이해하는 듯 했다. 지금은 이런 물리적인 과정을 병행하며 우리와 소통하는 기계가 주변에 거의 없는 듯하다. 성능이 좋은 메커니즘, 매뉴얼에 따라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스마트한 기계들뿐이다. 약간의 물리적 접촉을 필요로 하는 비디오 플레이어, 폴라로이드 카메라, LP판, 워크맨, 클래식 카, 두꺼운 뿔 안경테 등은 빈티지를 연상시키는 오브제다.

주인·공간에 따라 새롭게 재탄생

텍사스 미드포인트(Midpoint)의 레스토랑. 1950~60년대 빈티지 인테리어를 간직하고 있다.

텍사스 미드포인트(Midpoint)의 레스토랑. 1950~60년대 빈티지 인테리어를 간직하고 있다.

근래 미국의 케이블 방송에서 ‘아메리칸 피커스(American Pickers)’와 ‘전당포의 스타들(Pawn Stars)’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오래된 골동품을 찾아다니고 사고팔고 하는 과정의 에피소드를 엮은 형식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를 본 딴 프로그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각종 진귀한 물건과 흥정의 긴장감이 인기의 장치지만, 진정한 성공의 열쇠는 진행자들의 해박한 지식이다. 보통 앤티크(Antique)라 불리는 미국의 골동품은 소수 유럽에서 건너온 진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저 쓰다가 방치된 중고품이다. 하지만 미국은 길지 않은 역사에도 이런 물건들과 관련된 기록과 정서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수집해왔다. 역사와 문화의 일부분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역사채널에서 방영하는 것이다.

간혹 앤티크와 빈티지(Vintage)는 혼돈해서 사용되기도 한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앤티크가 ‘한 세기가 넘은’ 물건인 반면 빈티지는 ‘수십 년 전의’ 것 정도, 보통 1930년대에서 1980년대 까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이 모두 “우리의 이전 시대를 이야기해 주는 물건” 정도로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인사동의 민가다헌(閔家茶軒) 인테리어. 한옥에 서양식 앤티크를 조화시킨 공간이다.

인사동의 민가다헌(閔家茶軒) 인테리어. 한옥에 서양식 앤티크를 조화시킨 공간이다.

최근 앤티크와 빈티지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빈티지 패션, 빈티지 사진 등에 대한 향수가 만연하고 관련 제품들이 유행하고 있다. 왜 불편한데도 이런 걸 찾을까? MZ세대가 태어날 당시에는 요즘 사용되는 거의 모든 첨단의 문명기기가 이미 세상에 있었다. 이들이 성장하면서 새로 탄생한 발명품은 별로 없다. 그러다보니 익숙한 테크놀로지 환경이 어느 순간부터 지겨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해상도 좋은 스마트폰의 카메라 못지않게 일회용 카메라에 대한 문화도 경험하기를 원하게 됐다. 온갖 음악을 모두 다운로드 받아서 들을 수 있지만 LP를 모으기도 하고, 공연장이라는 물리적인 공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그리워한다. 테크놀로지가 발달하고 디지털에 노출될수록 한편에서 꿈틀거리는 정서적 반작용이다.

물건에도 생명이 있다. 생물학적으로 숨을 쉬는 건 아니지만 스토리와 역사를 가지고 있고, 새 주인과 공간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계속 빛나는 건 그 물성(物性)이다. 거친 질감의 철물, 폐가(廢家)에서 구하는 나무나 벽돌과 같은 고재(古材)의 느낌,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가죽제품 등에서 풍기는 질감은 특별하다. 심지어는 상업적 목적으로 제작된 플라스틱 제품이나 간판들도 정겹다. 하지만 앤티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이 하나하나의 물건이 다양한 과거의 사연들과 결별하면서 축적된 켜의 가치다. 물건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재료로부터, 어떤 목적으로, 누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사용되고, 또 사용되고, 광속에 처박혀 있다가 어느 날 발견되고, 매매되고, 새로운 공간에 새로운 역할로 등장하는 파란만장한 생의 여정을 겪는 것이다.

코펜하겐의 앤티크 상점. 앤티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각 물건이 다양한 과거 사연들과 결별하면서 축적된 켜의 가치다.

코펜하겐의 앤티크 상점. 앤티크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각 물건이 다양한 과거 사연들과 결별하면서 축적된 켜의 가치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앤티크가 붐이었던 적이 있었다. 골동품을 구입하고 소장하고, 또 판매해 수익을 얻는 재태크 수단이기도 했다. 요즈음 아트마켓 만큼이나 핫한 풍경이었다. 당시 성행했던 서울 장안동의 골동품 상점들은 현재 많이 축소된 상태다. 찾는 고객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실제로 이런 골동품들은 모던 인테리어와도 대조를 이루며 잘 어울린다. 물론 막연한 혼합이 아니고 현대의 감각을 아우르는 배경공간에 물품들을 조화시키는 것이 핵심이다. 전통 창호, 툇마루, 소반 등의 요소를 인테리어에 적극 활용했던 인사동의 민가다헌(閔家茶軒)이나 뉴욕의 한식 비스트로 곳간(Goggan)이 그러한 예다. 앤티크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폐품이다. 과거에 사용됐던, 나름의 스토리를 가진 물건들을 발견, 새로운 공간을 통해서 재탄생시키는 것은 리사이클(re-cycle)이 아닌 업사이클(up-cycle)이다. 이는 오랜 기간 서고 속에 묻혀있던 극작품이 감독에 의해서 발견되어 무대에 오르는 것과 유사하다.

명품 브랜드를 비롯한, 상대적으로 비싼 신상품들에 비해서 앤티크와 빈티지는 가격도 저렴한 편이다. 아무도 가지지 않은 물건을 소유한다는 가치도 있다. 독특한 물건으로 스타일을 뽐내는 방법이다. 그런 아이템을 잘 찾아서 취득하는 쾌감도 있다. 물론 지식과 안목이 중요하다. 단지 브랜드 이미지와 유행의 추종이 아니라, 공예정신과 문화역사적 가치를 알고 즐길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당당하게 누릴 수 있는 고급 럭셔리다. 그래서 앤티크에는 정가가 없다.

파리의 벼룩시장.

파리의 벼룩시장.

앤티크가 주는 매력의 내면에는 무엇보다 “내가 그 시기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다”는 회상이 담겨있다. 우리의 마음을 과거로 여행시켜 준다. 나이키타운이 ‘1970년대 대학의 스포츠클럽’을 테마로 인테리어를 꾸민 배경에는, 성공해서 자녀들에게 나이키 운동화를 사줄 수 있는, 당시 대학을 다녔던 중장년의 향수를 자극하는 전략이 있었다. 디트로이트의 도시재생을 선도한 브랜드 ‘샤이놀라(Shinola)’ 역시 미국 제조업의 황금시기 분위기를 브랜드 이미지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앤티크나 빈티지는 환경문제에도 기여하는 바가 크다. 미국의 앤티크 상점에 있는 가구로 전 미국 가정의 인테리어를 여섯 번 바꿀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버려지는 중고가구나 물건들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대량 생산과 일회용품의 홍수에 파묻힌 현대인의 일상에 긍정적인 반작용이 될 수 있다. 쓸 만한 물건들을 찾아내서 깨끗하게 윤을 내고, 박제된 생명을 부활시켜 다른 감각의 용도로 활용하는 자원의 재생은 도시의 재생만큼이나 큰 의미를 갖는다.

전 세계 앤티크 거리·시장 활기 넘쳐

미국 켄터키주의 앤티크 상점. 미국의 골동품은 소수 유럽에서 건너온 진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저 쓰다가 방치된 중고품들이다. 미국은 길지 않은 역사에도 이런 물건들과 관련된 내용과 정서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수집해왔다. [사진 박진배]

미국 켄터키주의 앤티크 상점. 미국의 골동품은 소수 유럽에서 건너온 진품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저 쓰다가 방치된 중고품들이다. 미국은 길지 않은 역사에도 이런 물건들과 관련된 내용과 정서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수집해왔다. [사진 박진배]

세상이 각박해지고 이전 세대보다 생활이 힘들어질수록 과거에 대한 동경이 꿈틀거린다. 빈티지의 본질적 매력은 ‘탈출’, 즉 현재의 일상에서 벗어나 과거로 회기 하는 것이다. 마치 고전 문학을 읽거나 클래식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것 같은 경험이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것, 인터넷으로 읽는 책은 나의 소유가 아니다. 하지만 내가 산 책, 누군가가 선물한 책은 나의 것이다. 앤티크에 부가되는 이런 감성적 가치는 개인적인 애착으로 귀결된다.

빈티지의 미학은 흔히 ‘연관된 미학(related aesthetics)’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된다. 과거의 어떤 공간이나 물건, 스토리와 추억, 그리고 그와 연결된 정서다. 동료교수 한 분은 생전 그를 아껴주시던 할머니의 책상을 자신의 서재에 간직하고 있다. 그 공간은 늘 자신의 마음에 평온을 주는 신전(神殿)이라고 표현한다. 앤티크는 이런 것이다.

박물관의 진열품들도 경이롭지만 앤티크와 빈티지가 이야기하는 생활 속 가치 역시 소중하다. 그래서 이런 물건들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박물관도 적지 않다. 아직도 전 세계의 앤티크 거리와 시장은 활기가 넘치고 사람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파리의 벼룩시장, 런던 노팅힐의 앤티크 거리, 프로방스 ‘릴 술 라 소르그(L’Isle-sur-la-Sorgue)’의 노천 시장은 그 공간 자체가 대표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앤티크와 빈티지 중에는 잊혀진 지 오래된 것도 있고, 사라진 것도 있고, 아직까지도 잘 사용되고 있는 것들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그 가치는 과거 어느 시점에 우리가 간직했던 것, 그리고 지금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추억이다. 앤티크를 사랑하는 것은 그 물건에 관련된 스토리의 모든 것,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박진배 뉴욕 FIT 교수·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 명예석좌교수. 연세대, 미국 프랫대학원에서 공부했다. OB 씨그램 스쿨과 뉴욕의 도쿄 스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뉴욕 아이디어』, 『천 번의 아침식사』 등을 쓰고, 서울의 ‘르 클럽 드 뱅’, ‘민가다헌’을 디자인했다. 뉴욕에서 ‘프레임 카페’와 한식 비스트로 ‘곳간’을 창업,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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