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지, 내구성 뛰어나 렘브란트 등 명화 복원에 딱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89호 19면

한지에 홀린 루브르 박물관

한지를 사랑하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그래픽아트부서 총 책임자 자비에 살몽.

한지를 사랑하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그래픽아트부서 총 책임자 자비에 살몽.

지난달 20일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서 ‘종이의 역사’ 전이 시작됐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기메 박물관, 국립도서관을 비롯해 16개 주요 국제기관부터 개인 소장품에 이르기까지 총 100여 점의 세계 지류 문화유산이 모인 자리다. 이곳에 우리의 종이 ‘한지’로 만든 도포·불교서적·지승공예품 등도 함께 전시됐는데 전시장 정중앙에 단독 공간을 차지하는 등 특별한 대접을 받고 있다. 이번 전시를 총괄 기획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그래픽아트부서 총 책임자 자비에 살몽의 한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

박물관 부관장에 해당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살몽은 미술품 복원에 필요한 종이를 찾다가 몇 년 전 한지를 알게 된 후 그 매력에 푹 빠졌다고 한다. 2020년에는 한지를 생산하는 전주를 직접 방문해 장인들을 만나기도 했다. 지난 13일 화상 인터뷰를 통해 살몽과 함께 한지의 매력과 유럽 내 시장 확장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디지털 시대에 ‘종이의 역사’전을 기획한 이유는.
“종이는 오랫동안 전 세계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사용해온 소재다. 전 세계 지류 문화유산을 살펴보는 일은 인류의 역사와 문화 가치를 재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종이 사용량은 점점 줄고 있다. 그럼에도 종이의 역사는 계속 될까.
“디지털 시대의 자료 보존 방법은 메모리카드 등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런 기기들은 점점 더 기술이 발전하면서 극단적인 경우, 구형 메모리카드에 저장된 역사적 자료나 이미지를 읽을 수 없는 상황도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종이는 그럴 일이 없다. 때문에 종이는 미래에도 역사를 기록하는 주요 도구로 존재할 것이다. 다만, 종이를 어떻게 활용할지, 또 종이를 생산하는 자재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종이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무다. 숲을 잘 보존하면서도 어떻게 나무를 이용해 종이를 대량 생산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종이 생산은 대단히 의미가 있고,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한지다. 한지는 식물성 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환경에 미치는 오염도 적다.”

루브르 소장품 복원사업 때 첫 만남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행중인 ‘종이의 역사’전. 한지로 바닥·창문·벽을 장식한 한옥, 조선 선비들이 수의로 사용했던 한지 도포가 전시됐다. [사진 자비에 살몽, 공진원]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행중인 ‘종이의 역사’전. 한지로 바닥·창문·벽을 장식한 한옥, 조선 선비들이 수의로 사용했던 한지 도포가 전시됐다. [사진 자비에 살몽, 공진원]

한지를 알게 된 계기는.
“루브르 소장품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다. 현재 루브르에서 한지를 사용하는 경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아주 귀중한 그림의 여백을 복원할 때다. 어떤 회화 작품 중에는 절대 원본을 만지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런 작품의 여백을 복원할 때 한지를 사용한다. 한지가 안정성이 높아서 원본이 파괴될 위험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메탈로 갈릭(metallo garlic) 잉크를 사용한 작품을 복원할 때다. 이 잉크는 산을 조합해 만드는데 굉장히 예쁘고 아름다운 검은색을 자랑하는 대신 빛과 공기에 노출될수록 갈색으로 변한다. 뿐만 아니라 잉크가 칠해진 종이가 약해지면서 구멍이 생긴다. 렘브란트가 이 잉크를 많이 사용한 작가로 그의 작품 중 파괴되고 보수가 필요한 부분을 복원할 때는 굉장히 얇고 섬세한 한지를 덧대곤 한다. 셋째는 오래된 가구를 복원할 때다. 수세기 전 만들어진 목재 가구들은 습도나 열에 각각 다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지나면 갈라지거나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 손상된 가구를 복원할 때도 한지를 사용한다.”

살몽은 한국인도 잘 모르는 한지 제작 과정과 우수성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특히 ‘외발뜨기’ 작업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다. ‘외발뜨기’란 닥나무 껍질을 벗겨 삶고 으깬 반죽(섬유)을 물에 푼 다음 대나무 발을 이용해 종이를 뜨는 전통방식이다. 이때 대나무 발을 잡아주는 천장 줄이 한 줄이어서 외발뜨기라 불린다. 살몽은 “장인이 한지 반죽 물을 떠서 발을 좌우로 흔드는 동작을 거듭할수록 희고 얇은 한지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마치 마법 같았다”며 “한지의 유연성·내구성이 뛰어난 이유가 이렇게 전통방식 그대로 만들기 때문이라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실제로 외발뜨기로 만든 한지는 밀도가 촘촘해서 결이 일정하고 질기기 때문에 오래 보관할 수 있다. 그동안 루브르 박물관 복원작업에는 일본의 ‘화지’가 많이 쓰였는데, 부분적으로나마 한지가 사용되기 시작한 이유도 이런 장점 때문이다.

일본 ‘화지’와 한국 ‘한지’의 차이점은.
“한지의 섬유 길이가 더 길어서, 더 오래가고 더 안정적이다. 이는 습도와 온도에 저항성이 높다는 말로, 보존이 중요한 미술품에는 핵심 요소다.”
루브르가 시작했으니 다른 유럽 박물관들에서도 한지가 쓰이지 않을까.
“한지의 품질 유지와 원활한 생산·공급에 달렸다고 본다. 아직까지 서양에선 일본의 화지가 유명하다. 이미 수 세기 전 서양에 들어왔고, 그 품질·투명성· 색상에 반한 작가들이 화지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등 여러 면에서 사랑받았다. 클로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에 가보면 집의 벽 한 면이 화지로 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서양인들의 수요가 폭발했을 때 일본은 대량 생산·공급으로 유행과 동시에 필요성을 만들어냈다.”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행중인 ‘종이의 역사’전. 한지로 바닥·창문·벽을 장식한 한옥, 조선 선비들이 수의로 사용했던 한지 도포가 전시됐다. [사진 자비에 살몽, 공진원]

아부다비 루브르 박물관에서 진행중인 ‘종이의 역사’전. 한지로 바닥·창문·벽을 장식한 한옥, 조선 선비들이 수의로 사용했던 한지 도포가 전시됐다. [사진 자비에 살몽, 공진원]

살몽은 이번 아부다비 전시에서 한지를 주요한 공간들에 배치했다. 관람객은 전시장 입구부터 한국 장인이 한지를 만드는 동영상을 감상하게 된다. 지류 문화유산들 한가운데 한옥 한 채가 무게감 있게 들어선 것도 파격적인 기획이다. 한옥 바닥·창문·벽에 두루 한지가 사용된다는 점을 관람객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자연스레 한지의 뛰어난 활용성을 알린다는 기획이다. 살몽은 “한국의 건축 장인 세 분이 아부다비에 열흘 간 체류하면서 미리 만들어온 구조물들을 조립했다. 전통방식대로 못이나 어떤 연결 장치도 없이 나무 구조물들을 연결하고 그 위에 한지를 얹는 장면은 그야말로 경이로웠다”고 했다.

전통 수의로 소개된 ‘도포’ 전시도 관람객 사이에선 화제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이하 공진원)이 문경의 외발뜨기 한지 수급부터 문광희 동의대 명예교수의 고증, 송년순 한복침선공예명장 제작까지 총괄 지원한 작품이다. 조선중기 이전까지 선비들은 수의를 따로 만들지 않고 자신이 가진 의복 중 가장 좋은 흰색 도포를 수의로 입었다고 한다. 살몽은 “한복의 품격과 한지의 가능성을 또 한 번 확인한 특별한 작품”이라고 했다.

한지, 대량 생산·공급 시스템 필요

한지 도포 전시를 위해 특별한 공간 연출을 기획했다고.
“죽음은 전 인류가 공유하는 개념이어서 흰색 종이로 만든 수의를 관람객에게 좀 더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때문에 주변에 색색의 종이 작품들을 전시하고, 그 한 가운데 새하얀 도포를 걸었다.”

정석대로라면 도포 안에는 바지·저고리 등 스무 가지 이상의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공진원에선 복식 예법대로 남성 한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보냈지만, 겉옷인 도포 하나만 전시한 것도 살몽을 비롯한 전시기획팀의 아이디어였다. 조명이 비췄을 때 한지의 질감과 색이 잘 보이려면 도포 안에 아무 것도 없는 게 더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는.
“한국인 동료·장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프랑스 양국 간의 오래된 관계와 문화재들을 재발견하고 놀랐던 적이 많다. 특히 15세기경 구텐베르크의 발명보다 100년이나 앞서 한국에서 이미 인쇄술이 발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프랑스인이 많다.”
종이 펜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나.
“절대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집과 사무실에 컴퓨터가 없다. 펜이 종이에 닿는 촉감을 너무 좋아해서 직접 모든 것을 수기로 관리한다. 이메일 체크? 삼성 휴대폰으로 한다.”(웃음)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