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지웠던 스승의 강의 칠판은 "가장 지적인 예술작품"[BOOK]

중앙일보

입력 2022.05.20 14:00

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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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나의 인생
정운찬 지음
나남출판

고희(古稀·70세)를 훌쩍 넘긴 75세의 제자가 상수(上壽·100세)를 바라보는 올해 94세의 스승을 위해 책을 썼다.

스승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88~90), 한국은행 총재(1992~93), 초대 민선 서울시장(1995~97)을 역임한 조순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이고, 제자는 서울대 총장(2002~2006)과 국무총리(2009~2010)를 지낸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이다. 두 사람 모두 한국 현실에 깊이 천착한 경제학자로, 경세제민(經世濟民)을 공직에서 실천한 경세가로 이름을 날렸고, 잠재적 대선 후보 반열에 오른 것도 비슷하다.

왼쪽부터 정운찬, 조순, 그리고 전성인 홍익대 교수. '경제학원론' 개정작업 때 모습. [사진 나남출판]

왼쪽부터 정운찬, 조순, 그리고 전성인 홍익대 교수. '경제학원론' 개정작업 때 모습. [사진 나남출판]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지에서 교수를 하다 1967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스승은 “혜성같이” 등장했다. 스승의 첫 강의는 케인스의 『일반이론』이었다. 서울대에서 최초로 케인스를 비롯한 현대경제학 강의를 시작한 스승에게 저자를 비롯한 학생들은 매료됐다.

스승의 강의 칠판은 “가장 지적인 예술작품”이었다. 영어·독일어는 물론 한시(漢詩)까지 막힘이 없었던 스승의 내공이 칠판을 채웠다. 제자는 칠판을 지우면서 강의를 복기하는 기쁨을 누렸다. 이를 계기로 특별한 사제의 인연이 시작됐다. 제자는 스승의 ‘경제학특강’에서 학부 4년간 배울 경제이론의 거의 모든 것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강의 노트에는 ‘얻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것도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는 것 또한 경제정책이다’ 등 세월을 견디고 지금도 유효한 스승의 가르침이 오롯이 남아있다.

1989년 관악산 등반. 왼쪽부터 정운찬, 조순, 그리고 고(故) 곽승영 미국 하워드대 교수. [사진 나남출판]

1989년 관악산 등반. 왼쪽부터 정운찬, 조순, 그리고 고(故) 곽승영 미국 하워드대 교수. [사진 나남출판]

인생 고비마다 스승이 함께했다. 부친을 일찍 여읜 제자에겐 아버지 같은 스승이었다. 한국은행에 다니던 제자에게 미국 유학을 권하고 주선했으며 제자의 결혼을 위해 신부 부모를 직접 만나 설득하기도 했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라며 제자의 신문 글쓰기를 적극 독려한 것도,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6년 서울대 교수의 시국선언을 주도했다가 어려움을 겪던 제자에게 당시 여당인 민정당 의원 김종인 박사를 소개한 것도 스승이었다. 김 의원은 파면 위기에 몰린 제자를 도왔다. 스승은 제자의 서울대 총장 취임사를 고쳐주기도 했다. 조언은 구체적이었다. “취임사는 중요함. 다시는 안 오는 기회. 하나의 행사로 생각하지 말 것. 굵게, 힘 있게, 그러나 정중하게.”

스승은 제자를 아랫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존중하며 대등한 입장에서 교유했다. ‘운찬 호우(好友, 좋은 벗)’로 시작되는 편지와 엽서를 제자에게 보내곤 했는데, 영어로 썼다는 점이 특이하다.

스승과 제자는 현대사 곳곳에 등장한다. 1997년 대선 출마를 고민하던 스승에게 제자는 완곡하게 반대의견을 전했다. 김대중 정부의 한국은행 총재직 제안을 제자는 거절했다. 총재를 마치면 55세인데 학교와 정부를 오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서울대 철폐론에 반대하며 노무현 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이어졌지만 “노련한 히트 앤드 어웨이(hit and away) 전법”이 돋보인다는 평가도 받았다. 스승과 김종인 박사는 제자의 대선 출마를 권유했다. 제자는 고민 끝에 뜻을 접었다. “‘세상에 비쳐진 나’는 ‘진짜의 나’와 너무 달라”서다.

그 후 저자는 이명박 정부의 총리가 됐다. 의욕적으로 추진한 세종시 수정안은 대통령 지침을 받고 총대를 멘 게 아니라고 썼다. 수정안은 결국 무산됐다. 저자는 ”우리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건설계획이 대선공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면(중략), 세종시 수정 노력은 절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 지난 대선 때 포퓰리즘 공약이 또 나온 걸 보면 아직도 갈 길은 멀다. 책 뒷부분에 저자의 최근 10년간 화두인 동반성장 얘기가 나온다. 지난해 저자가 출간한 『한국경제, 동반성장, 자본주의 정신』도 함께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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