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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반지성주의, 민주주의에 대한 착각에서 나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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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지성 혐오의 배경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1년 반 전에 모 방송PD가 주요 일간지에 쓴 칼럼이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양친이 부부싸움을 할 때 책 안 읽는 부친이 다독가인 모친의 논리정연한 말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친의 “지적 우월감”에 “정서적 폭력”을 느껴 “손찌검”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안타깝다… 내가 책에서 배운 것을 타인에게 적용하면 그건 폭력이다… 평생 책 한 권 읽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살아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으니까 안 읽는 거다. 어머니는 불편한 게 너무 많다.” 칼럼은 이어서 “선민의식에 빠져” SNS에 “세상을 조롱하는 글”을 올리는 지식인을 훈계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PD와 신문의 정치 성향으로 미루어보아, 당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던, 진영을 가리지 않는 ‘모두까기’로 유명한 논객을 겨냥한 칼럼이라는 해석이 많았다.

곧 독자들의 항의 댓글이 빗발쳤는데, 주로 가정폭력을 피해자 탓으로 돌리고 합리화한 점, 미워하는 지식인 공격하자고 모친에게 2차 가해를 한 점에 대해서였다. 마땅한 비난이었지만 그것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간과된 것은 칼럼 전체에 흐르는 강렬한 반(反)지성주의였다. 문제의 PD와 신문이 사과를 하고 칼럼을 내렸기 때문에 실명은 거론하지 않겠지만, 이 칼럼을 굳이 끄집어낸 이유는 최근 화두가 된 반지성주의가 대체 무엇인지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칼럼에는 지식인에 대한 복합적 태도, 즉 그들에게서 “오만함”을 느끼는 열등감과 그들의 ‘불편러’ 기질에 대한 짜증과 그들의 문약함을 힘으로- ‘선출된 권력’이 소환하는 대중 여론으로든 부친의 주먹으로든- 밟아버릴 수 있다는 경멸이 섞여 있다. 문제의 PD가 가방끈 짧은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도 반지성주의가 학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전문가 불신, ‘불편러’ 지식인 혐오
진영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만연
미국선 “평등주의·실용주의가 원인”
SNS·출판시장 보면 한국도 닮은꼴

반지성주의는 진영 또한 가리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민주주의 위기의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이 바로 반지성주의”라고 한 이후 여·야 양측의 지지자들이 서로의 반지성주의를 지적하며 유행어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반지성주의는 본래 진영과 체제를 막론하고 나타났다. 반지성주의 현상을 본격적으로 분석한 대표적 저서 『미국의 반지성주의(원제:Anti-intellectualism in American Life)』(1963)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사실 반지성주의는 서로 대척점에 선 세력들의 공통된 특징이 되기도 한다. 기업가와 노조 간부가 지식계급에 대해 놀라울 만큼 비슷한 견해를 가지기도 한다.”

“무지와 지식의 평등이 민주주의라는 착각”

‘지식인(intellec tual)’이란 말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탄생했다. 펜을 칼처럼 휘두르며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글 ‘나는 고발한다’를 쓰는 소설가 에밀 졸라의 캐리커처. [사진 핀터레스트 캡처]

‘지식인(intellec tual)’이란 말은 19세기 말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에서 탄생했다. 펜을 칼처럼 휘두르며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글 ‘나는 고발한다’를 쓰는 소설가 에밀 졸라의 캐리커처. [사진 핀터레스트 캡처]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1916~1970)가 이 책을 쓴 계기는 1950년대 매카시즘(공산주의자 색출 열풍)과 함께 진행된 지식인과 지성에 대한 혐오 풍조였다. 저자는 반지성주의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대신 여러 예문을 들었는데, 그중에는 당시 어느 우파 소설가의 지식인에 대한 정의도 있다. “지식인=문제의 모든 측면을 검토하다가 혼란에 빠져 제자리를 맴도는 자의식 과잉 잔소리꾼… 대중의 생각과 정서와 동떨어져 있는 게 문제.”

이 말이 위험한 것은, 세상사는 양쪽 말 들어보고 시간을 두고 다각도로 봐야 하는 게 많건만, 귀찮으니 ‘이게 다 XX 때문이다’로 요약하고 행동을 위해 돌진하자는 것이며, 또 세 사람 중에 두 명이 ‘맹자가 공자 스승’이라고 주장하면 그게 진실이라는 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지성주의는 반대 진영인 공산주의 정권에서도 더욱 극단적이고 참담하게 나타났는데, 캄보디아 크메르 루주가 고등교육 받은 민간인을 대량 학살한 것과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이 지식인을 린치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한 게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악당 같은 반지성주의자가 따로 존재하는 경우는 극히 소수이며, 사실 우리 모두가 반지성주의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호프스태터에 따르면 “그것은 반지성주의가 좋은 대의명분과 연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우리(미국인의) 사고방식에 강한 영향을 미친 건, 인도적이고 민주적인 정서를 전달해주기도 한 복음주의 신앙이 반지성주의를 육성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반지성주의가 우리 정치에 비집고 들어온 것도, 평등을 향한 우리의 열정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복음주의 신앙은 신학자가 연구한 교리보다 민중의 직관적 믿음과 실행을 중시한다. 기독교와 함께 미국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는 자본주의에서 종종 숭배의 대상인 기업가 정신 역시, 전문가적 분석보다 직관에 의존하고 신념과 행동력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들도 중요한 가치들이지만, 전문지식이나 지적 통찰을 필요로 하는 복합적인 사안에서 직관적 신념을 같은 무게로 놓는 왜곡된 평등주의를 대입하면, 즉 비전문가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비판적 지식인들이 조리돌림 당하면, 반지성주의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로봇 3원칙’으로 유명한 SF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는 1980년 뉴스위크 지 칼럼에서 “민주주의가 ‘나의 무지나 너의 지식이나 별 차이 없다’를 뜻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미국의 반지성주의를 키워왔다”고 신랄하게 말했다.

비실용적 지성에 대한 무시, 한국도 비슷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초판본 표지. [사진 구글 캡처]

호프스태터 『미국의 반지성주의』 초판본 표지. [사진 구글 캡처]

호프스태터가 미국 반지성주의의 또 하나의 원인으로 뽑은 것은 실용주의, 즉 당장의 쓸모는 없는 창조와 비판의 능력인 지성(intellect)은 무시하고 구체적인 일 처리에 필요한 지적 능력(intelligence)만 존중하는 풍조다. 예를 들어 발명왕 에디슨은 신화까지 덧붙여 숭배하지만, 순수과학자에는 무관심하고, 문인과 전위예술가는 아예 혐오하는 경향 말이다. 이에 반해 지식인은 실용성을 초월한 “정신의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념적 실용성에 치중하면 이념의 광신자가 되어 지식과 정보를 이념에 끼워 맞추고 음모론을 신봉하게 되며, 경제적 실용성에 치중하면 지식장사꾼으로 전락하거나 정치권력과 기업 자본의 고용인이 될 뿐이다. 이런 사례는 지금 한국에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여기에 지식인(intellectual)이라는 말의 유래도 상기해야 한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애국주의와 반유대주의 광풍 속에서 드레퓌스라는 유대계 장교가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을 때, 자유로운 정신의 유희를 즐기던 문인들이 들고 일어나 대중의 조리돌림을 당하며 그를 변호했고, 그때 그들은 최초로 ‘지식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반지성주의에 있어서 한국은 미국과 닮은꼴이다. 다른 선진국보다 훨씬 빠르고 압축적으로 진행된 한국의 산업화와 민주화는 각각 강한 실용주의와 평등주의를 키웠다. 실용주의의 경우, 그 뿌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백범 김구가 개탄한 “주자학파 철학에 기초한 계급 독재” 속에서 정신의 유희는 한 줌 양반에게만 허락되었고 그나마 사문난적이 되지 않는 범위였으며 대개는 과거 시험 합격이라는 실용적 목적으로 학문을 했으니 말이다. 현대 한국의 베스트셀러는 철저히 실용서 위주이고 간혹 있는 인문학 베스트셀러도 입시나 자기계발용으로 정리된 책이 대부분이며, 순수한 지적 유희를 위한 책은 매우 인기가 없다. 여기에 더해, 맹목적 평등주의의 물결 속에서 SNS와 커뮤니티 여론이 각계 전문가를 압박하고 때론 조리돌림한다.

이런 상황에서 윤 대통령이 반지성주의를 화두로 꺼낸 것은 의미 있다고 본다.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을 지적한 점, 문제 해결을 위해 “자유”를 강조한 점, “어떤 사람의 자유가 유린되거나 자유 시민이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모든 자유 시민은 연대해서 도와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정글식 자유방임이 아니라 존 스튜어트 밀(1806~1873) 식으로 약자를 포함한 모두의 자유를 위해 자유의 조율과 견제를 추구하겠다고 암시한 것도 바람직하다. 다만, 대통령은 반지성주의와 불균형한 자유의 문제가 자신의 지지자들에도 해당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당장 집권당이 비판받고 있는 ‘약자 혐오 장사’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많은 이들이 주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