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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성철의 퍼스펙티브

‘부실 설계된 전두환표 헌법’, 이제 그 근본을 바꾸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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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총리 임명 둘러싼 논란의 근원, 엉성한 헌법에 있다

전성철 변호사, 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전성철 변호사, 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

우리 정치를 보면 한마디로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새 정권이 출범한 지 열흘이 넘도록 총리 하나 마음대로 임명하지 못하고 정치 씨름만 계속되고 있다. 선진국 중에서 우리 같은 괴로움을 겪는 나라는 대한민국 외에는 없다. 왜 그럴까? 국민이 저질이라서 그럴까? 정치인들이 모자라서 그럴까? 아니다. 한마디로 이 나라 헌법이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전두환이라는,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완전 맹탕이었던 독재자, ‘체육관 대통령’이 주도해 만든 헌법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헌법의 부실 설계로 국민이 많은 고통을 받아 왔다.

우리 헌법이 어느 정도 맹탕인가? 대통령 중심제인데 총리를 두었다는 것은 아마도 프랑스식 이원집정제를 흉내 낸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냈어야 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도 총리 임명 때 의회의 인준을 받아야 하지만, 대통령에게 국회 해산권이 있다. 그래서 야당이 아무리 다수당이라도 경거망동할 수가 없다. 우리 헌법에는 이런 류의 무식과 무지, 사려 깊지 못함이 곳곳에 널려  있다.

총리 임명 둘러싼 소동들, 역사 발전 기본 원리 모른채 만든 헌법 때문
독재자가 원칙·원리 없이 만든 ‘제멋대로 헌법’이 말썽과 논란의 원천
‘배고프지 않고, 아프지 않는 나라’를 향한 역사 발전 이룰 새 헌법 시급
윤석열 대통령, 새 헌법이라는 자랑스런 유산 남기는 정권되길 기대

그렇다면 제대로 만든 헌법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선진국 중 대통령제를 본격적으로 하는 나라는 사실상 두 나라 밖에 없다. 우리와 미국이다. 그런데 ‘미국이 위대한 나라가 된 것은 헌법 덕분’이라 하는 사람이 많다. 미국 헌법은 어떤 점이 잘 되었단 말인가? 한마디로 정치판이 싸움판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여야가 강렬하게 토론하고 경쟁하되 농성하고 몸싸움할 필요 없이 어느 시점에서는 타협이 이뤄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이다. 모든 정당과 의원들로 하여금 ‘겸손’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의미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다는 것인가?

전성철의 퍼스펙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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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헌법의 궁극적인 목적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헌법은 도대체 왜 만드는가? 한마디로, 나라의 역사 발전을 제대로 이루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역사 발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쉽게 표현한다면, 국민이 ‘배고프지 않게’, 그러면서 또 ‘배가 아프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다른 말로, 국민으로 하여금 ‘풍요’하게, 그러면서 ‘평등’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우선 나라에 ‘떡’이 많아야 한다. 풍요로워야 한다. 그러나 ‘떡’이 일부에게만 과도하게 돌아가면 반드시 ‘배 아픈’ 사람이 생기게 된다. ‘배 아픈 사람’이 많은 나라는 절대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이 둘이 비슷한 수준으로 같이 나갈 때 그 나라는 선진국으로의 도정을 제대로 밟게 된다. 이 중 한 가지만 현저히 부족해도 그 나라는 절름발이 국가일 뿐이다.

지난 70여년의 우리 역사는 바로 그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처절한 노력과 희생의 역사였다. 1960년대 박정희 리더십은 국민을 ‘배고프지 않게’하는데 집중됐다. 즉 철저한 보수 정권이었다. 만일 그 역사만 계속 되었더라면, 우리는 지금 거대한 빈부 격차로 온 국민이 신음하는 나라가 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 우리 젊은이들이 역사적으로 두 번이나 피 흘리며 싸워 주는 바람에 우리는 보수 독재의 종식을 이룰 수가 있었고, 덕분에 ‘배 아프지 않은’ 것을 중시하는 김대중·노무현 같은 진보 정권을 맞을 수 있었다. 이런 역사를 통해 다행히 우리는 ‘배고프지 않은 것’과 ‘배 아프지 않은 것’ 간의  균형을 상당히 이룩하는 바람에 선진국 반열에 들어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이 두 가지 노력이 동시에 일어나기가 무척 힘들다. 떡을 많이 키우면서, 많이 나누는 것을 동시에 이루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이야기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 두 가지가 원초적으로 상호 모순되는 면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나라의 ‘떡’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마디로, 국민에게 ‘자유’를 많이 줘야 한다. 자유를 얻으면 대부분의 시민은 신이 나서 뛰게 된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회 전체에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발현시킨다. 이 에너지가 나라 경제를 발전시킨다. 이런 상황을 조성하고자 노력하는 집단이 ‘보수’라는 정파다.

그러나 ‘자유’를 통해 이룩된 풍요에는 불행히도 반드시 부작용이 따른다. 즉, ‘배 아픈 사람’이 생긴다. 사람의 능력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이 배 아픈 사람들을 어루만져서 그 고통을 줄이는데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들이 있다. 소위 ‘진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 즉, 가진 자들로 하여금 이것저것 못 하게 하고, 또 세금으로 최대한 많이 끌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수와 진보가 번갈아 정권을 잡아가는 데서 한 나라의 역사 발전, 즉, 풍요하면서도 평등한 나라로 향한 여정이 계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소위 민주주의라는 것이 도입된, 지난 수 백 년 간 인류가 깨달은 중요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 나라가 떡을 ‘키우는’ 것과 ‘나누는’ 것, 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이루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사실이다. 자유를 많이 주면서 동시에 뺏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두 가지 과제는 동시가 아니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깨닫게 된 것이었다. 민주주의는 바로 이 순차적 작업을 실현하도록 해 주는 핵심 기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지나? 국민 다수가 ‘이제 떡을 키우는 것이 더 급하다’고 느낄 때는 보수에 정권을 준다. 그래서 나라 전체의 ‘떡’이 커진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 빈부의 격차도 커진다. 그 정도가 좀 심하다고 판단될 때는 국민이 진보에 정권을 준다. 그러면 진보 정권이 좀 더 평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렇게 보수와 진보가 교대로 집권하면서 ‘떡 키우기’와 ‘나누기’가 교대로 잘 이루어지는 나라, 이런 나라는 계속 ‘발전하는 역사’를 갖게 된다. 다행히 우리나라도 그런 나라에 속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 등이 떡을 키웠다면 김대중·노무현·문재인 정부는 떡을 나눠 온 셈이다.

이것이 바로 소위 민주주의라는 것이 제공하는 거대한 마력이다. 민주주의를 제대로 하지 않은 나라 중 선진국이 된 나라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가장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다. 미국은 그 반대의 명제, 즉, 민주주의만이 위대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상징적 나라다.

미국은 도대체 어떻게 그것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한마디로, 제대로 된 헌법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250여년 역사에서 무려 27차례나 개헌을 한 나라다. 그 개헌의 가장 빈번한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보수’와 ‘진보’가 각각 그 시대에 맞게 국민의 뜻에 따라 자신들의 역사적 역할과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국민의 ‘배고픈’ 문제와 ‘배 아픈’ 문제를 교대로 고쳐가는 수단들을 제대로 제공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 헌법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기에 그런가? 한마디로, 새로 집권하는 대통령은 모두 자신의 이념적 사명, 즉, ‘떡을 키우는 것’, 혹은 ‘나누는 것’ 중 하나를 제대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갖는다. 헌법이 그런 장치를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미국의 공무원은 정무직과 관료직으로 나뉜다. 정무직은 ‘떡을 키우느냐’ 혹은 ‘나누느냐’ 하는 방향성을 책임지는 공무원이다. 새 대통령은 누구나 정무직은 모두 새로 임명할 수 있다. 도덕적 흠결만 없으면 대통령은 누구나 자유롭게 임명하여, 어떤 이념적 갈등도 없이 나라의 방향을 그쪽으로 끌어갈 수 있게 돼 있다 .

예를 들어, 보수가 집권하면, 나라의 모든 큰 작용들이 모두 ‘떡을 더 많이 키우는 방향’, 즉, 자유를 신장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반면, 진보 정권이면 나라가 평등, 즉, 떡을 나누는 방향으로 작동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정치 역사는 항상 떡을 키우는 시대와 나누는 시대로 나뉘어 반복되면서 나라 전체가 균형되게 발전했고, 그것이 저 위대한 역사가 창조된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였다. 미국이 저렇게 된 것의 70%는 한마디로 제대로 된 헌법이 있었고, 그것이 준수됐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이에 비춰보면 우리 헌법은 한마디로 규격이 제각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부실 설계’ 수준이다. 원칙도, 원리도, 질서도 없는 제 멋대로의 헌법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헌법을 제대로 고치는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무엇보다 나라의 기본 틀인 헌법의 구조를 새롭게 짜는 대통령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전성철 변호사, 글로벌스탠다드연구원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