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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서 들어가 판 짠다"...尹, IPEF 결단 명분은 ‘창립멤버 지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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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초반에 들어가야 '룰 테이커'(rule taker)가 아니라 '룰 메이커'(rule maker)가 된다." (외교부 당국자, 19일)

윤석열 대통령이 조 바이든 대통령과 오는 21일 만나 인도ㆍ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를 선언하려는 핵심 이유다. '창립 멤버'로서 지분을 최대한 챙기는 게 중국의 견제로 인한 리스크를 넘어서는 실익과 명분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다.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EPA.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EPA. 연합뉴스.

"美 붙들고 지분 챙기기"

IPEF는 미국이 미리 판을 다 짜두고 동맹ㆍ우방을 모으던 기존의 협의체와는 다르다. △무역 △공급망 △청정에너지·탈탄소·인프라 △조세·반부패 등 IPEF를 떠받치는 4개의 기둥(pillar)만 세워둔 상태로, 내용은 가입국이 함께 채워 나간다. 국가별로 원하는 기둥에만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유연성도 갖췄다. 김상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한국도 이슈를 선점해 우리만의 공간을 만들어갈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ㆍ일본을 비롯해 10여개국의 참여가 사실상 확정됐다. 화상 출범식도 곧 열린다. 외교 소식통은 "현재 IPEF는 흰 종이나 다름 없다"며 "마침 한국은 IPEF에 부합하는 선진적 제도도 이미 갖춰 스타트가 좋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출범 때부터 동맹을 '힘을 배가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미국이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지만, 동맹과 협력하면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점한다는 판단이다.

실제 현재 참여가 확실시되는 10여개국의 명목 GDP(국내총생산)를 합치면 중국 GDP의 거의 두 배다. 양적으로 경제 규모에서 중국을 압도할 뿐 아니라 10여개국의 선진 기술력을 고려하면 질적으로도 공급망 재편, 디지털 기술 패권 경쟁에서 중국을 따돌리는 게 가능하다.

백악관이 지난 2월 공개한 인도ㆍ태평양 전략 관련 보고서에 IPEF가 간략히 소개돼 있다. 백악관 자료 캡처.

백악관이 지난 2월 공개한 인도ㆍ태평양 전략 관련 보고서에 IPEF가 간략히 소개돼 있다. 백악관 자료 캡처.

中 리스크 관리 어떻게

이에 대한 중국의 견제는 벌써부터 노골적이다. "(미국의) 사리사욕으로 아ㆍ태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는 통하지 않는다"(양제츠 공산당 정치국원, 18일), "한ㆍ중이 디커플링과 공급망 단절에 반대해야 한다"(왕이 외교담당 국무위원, 16일) 등 고위급 인사들의 공개 발언은 중국이 IPEF를 대중 포위망 구축 시도로 인식한다는 걸 보여준다.

그런데도 정부가 '어차피 IPEF에 들어갈 거라면 좌고우면 말자'고 결정한 데는 과거의 경험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모호하게 굴며 중국의 기대감을 키워봤자 후폭풍만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박근혜 정부는 2016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 발표 전 중국을 고려하며 '3NO'(사드 관련 요청ㆍ협의ㆍ결정 없음) 입장을 유지하다가 전격 배치로 입장을 급선회했고, 중국이 더 크게 반발하는 빌미를 줬다. 문재인 정부도 중국이 껄끄럽게 여기는 쿼드(Quad, 미국·일본·호주·인도 간 안보협의체)에 대해 "미국이 동참 요청을 한 적 없다"는 말을 반복하다 뒤늦게야 '워킹그룹별 협력'을 추진했다. 지금은 정식 가입을 원해도 미국이 당장 쿼드를 확장할 생각은 없는 단계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16일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상견례를 겸해 화상 통화를 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왕 위원은 "디커플링과 공급망 단절의 부정적 측면에 반대하고 글로벌 산업, 공급망의 안정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중국 외교부가 같은 날 밝혔다. 외교부.

박진 외교부 장관이 16일 왕이(王毅)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상견례를 겸해 화상 통화를 하는 모습. 이 자리에서 왕 위원은 "디커플링과 공급망 단절의 부정적 측면에 반대하고 글로벌 산업, 공급망의 안정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중국 외교부가 같은 날 밝혔다. 외교부.

정부는 중국에 내밀 명분도 충분히 확보했다는 입장이다. 우선 한국은 반도체 제조 강국이지만, 원천 기술은 미국에 의존한다. 미국 주도의 공급망 재편에서 어차피 빠질 수 없다. 일각에서는 "오히려 중국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국이 초기부터 참여하는 게 IPEF가 노골적 반중 노선으로 흐르는 걸 막는 완충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대중 논리가 가능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무엇보다 WTO(세계무역기구) 체제를 중심으로 한 기존 무역 질서 규범은 최근 급부상하는 디지털 전환, 탈탄소 등 경제안보 이슈를 포괄하지 못한다. 앞서 중국이 주도해 한국, 일본 등이 가입한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도 결국 전통적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관세 장벽이 아닌 비관세 장벽을 해결하려는 IPEF와는 정체성이 다르다.

김양희 국립외교원 경제통상개발연구부장은 "한국은 어디까지나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인태지역에서 새로운 국제 무역 규범을 만들기 위해 IPEF에 참여하는 것이며, 중국과도 관련 협력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아직 백지 상태인 IPEF에는 대중 견제 요소가 확실히 규정된 게 없다. 중국이 IPEF 출범 전부터 "디커플링 시도", "미국의 사리사욕"이라며 '급발진'할 명분이 약한 게 사실이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19일 기자들과 만나 "IPEF는 절대 중국을 배제하지 않는다"며 중국의 반발 가능성에 대해서도 "여러 가입국 중 한국에게만 그러겠냐"고 반문했다.

한국무역협회가 최근 발간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시사점' 보고서에 정리된 '역내 주요 경제ㆍ안보 협의체 역학 구도'. 무역협회 자료 캡처.

한국무역협회가 최근 발간한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시사점' 보고서에 정리된 '역내 주요 경제ㆍ안보 협의체 역학 구도'. 무역협회 자료 캡처.

‘낮은 문턱’ 딜레마

다만 순항을 낙관하기만은 어렵다. 미 외교전문지 더 디플로맷은 지난 17일(현지시간)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12~13일(현지시간) 아세안 국가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IPEF를 홍보했지만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며 "높은 수준의 노동 환경과 반부패 규칙을 요하는 협정에 들어오라면서 시장 접근 등 당근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IPEF엔 현재 관세 인하 혜택이 없다.

의회 비준 절차나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는 '느슨한 성격'을 유인책으로 가입국들의 초기 진입 장벽을 낮췄지만, 구체성과 실효성이 부족해 흐지부지될 수 있다는 동전의 양면같은 우려도 존재한다. 미국 국내정치적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바이든 대통령이 오는 11월 중간선거, 더 나아가 2024년 대선에서 어떤 결과를 받아드느냐에 따라 IPEF를 비롯한 대외 무역 정책이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초기 지분을 명분으로 참여하는 만큼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지적도 그래서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IPEF 관련 미국에 질문만 던질 게 아니라 한국도 끊임없이 대안을 제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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