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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비약품 바친다" 김정은의 애민, 되레 北참상만 더 드러났다

중앙일보

입력

북한 제약공장에서 제조한 링거팩의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 제약공장에서 제조한 링거팩의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이 코로나19에 방역망이 뚫렸다고 시인한 직후인 지난 1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가정에서 준비한 상비약품을 본부 당위원회에 바친다"고 밝혔다. '애민 정신'을 강조하려던 것이지만, 그를 비롯한 지도층은 의약품을 상비해 놓을 여유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관영 매체를 통해서는 "열이 나면 버드나무잎을 우려먹으라"고 권했다. 북한 내 의약품 쏠림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북한이 그간 공개한 자료와 전문가 분석 등을 종합한 결과 북한은 항생제 등의 의약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능력 자체는 갖춘 것으로 확인됐다. 고난의 행군 이후 받아들인 외부 지원 덕에 수년 간 기술을 전수받고 설비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북한은 순천제약공장, 평양제약공장, 정성제약종합공장 등 10여개 중앙급 제약공장에서 3~4종의 항생제를 비롯한 20여종의 의약품을 생산 중이다. 특히 정성제약종합공장은 남측 대북 지원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과 손잡고 생산 시설을 현대화해 혈전 용해제와 수액 등을 생산해왔다.

평양 정성제약종합공장에서 제조한 5% 포도당 수액 링거팩의 모습. 링거팩에는 생산일자와 사용일자가 표기돼 있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평양 정성제약종합공장에서 제조한 5% 포도당 수액 링거팩의 모습. 링거팩에는 생산일자와 사용일자가 표기돼 있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KDB산업은행 한반도신경제센터가 발간한『2020 북한의 산업』에 따르면 북한은 포도당 수액, 해열진통제, 항생제, 혈전 용해제, 간염백신, 페니실린, 스테로이드제, 항결핵제 등의 의약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동시에 지방급 소규모 제약공장에서는 원료 확보가 상대적으로 수월한 고려약(한방약) 1200여종을 재래식 공법으로 생산한다. 북한 당국이 의약품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고려의학(한방)을 강조한 결과다. 이로 인해 1차 진료기관에서 고려약을 처방하는 비율이 70%에 이른다.

평양에 위치한 대동강주사기 공장에서 생산한 주사 바늘의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평양에 위치한 대동강주사기 공장에서 생산한 주사 바늘의 모습.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의 의약품 포장지를 수집해 연구해온 강동완 동아대 교수는 "품질이나 효능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북한이 다양한 의약품을 생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탈북민의 증언은 탈북 시기나 거주지역에 따라서 큰 편차를 보일 수 있다. 일각에서 언급하는 맥주병 링거 주사의 경우 20년 전이면 몰라도 현재는 드문 사례"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북한 당국이 해열용으로 버드나무 잎을 권하게 된 건 주민들의 수요만큼 의약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유통할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수 서강대 교수는 "제재와 봉쇄의 영향으로 의약 원료가 부족해 생산량이 충분하지 않다"며 "전력 문제로 콜드 체인(저온유통) 및 멸균 시스템 구축이 어려워 약이 있어도 안정적인 유통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는 공정치 못한 분배라는 문제로 직결된다. 북한 보건·의료 시스템이 코로나19 확산 초기부터 붕괴 조짐을 보이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강동완 교수는 "서해5도 지역에서 발견한 북한 의약품을 살펴보면 평양을 중심으로 생산과 유통이 이뤄진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 용문제약공장에서 만든 우황청심환의 모습. 북한 매체들은 지난 14일 우황청심환을 더운물에 타서 먹으면 열을 내리게 하고 진정작용에 효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북한 용문제약공장에서 만든 우황청심환의 모습. 북한 매체들은 지난 14일 우황청심환을 더운물에 타서 먹으면 열을 내리게 하고 진정작용에 효과가 있다고 소개했다. [사진 강동완 동아대 교수]

사실 북한 의료시스템의 근간은 무상치료이지만,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상당 부분 무너졌다. 의약품의 생산과 배급이 원활치 못하자 특권층을 제외한 일반 주민들은 국영 의료기관을 이용하는 게 아예 어려워졌다.

여기에 장기간의 경제 침체와 핵·미사일 개발에 따른 제재로 의료 물자 반입까지 통제되면서 북한의 보건·의료체계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에 주민들은 장마당의 의약품 매대 같은 비공식 경로로 필수 의약품을 겨우 구했는데, 그마저도 2년 넘게 코로나19 차단을 위한 국경 전면 봉쇄가 이어지면서 꽉 막힌 상황이다.

북한이 최근 몇 년 사이 평양을 중심으로 대형병원 건설, 제약공장 현대화 등을 통해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에 따른 문제의식의 발로였다. 하지만 전체 주민들의 수요에 비하면 역시 미미한 규모인 데다 진행 자체가 원활치 않다.

김영수 교수는 "평양과 비평양 주민들의 생활 수준에 차이가 크게 나타나듯 의료환경도 지역이나 계층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며"최고 지도자가 평양종합병원 건설을 지시했음에도 완공 소식이 아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북한의 의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7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코로나19 전파상황을 점검하고 주민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주문했다. 노동신문, 뉴스1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17일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코로나19 전파상황을 점검하고 주민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주문했다. 노동신문, 뉴스1

한편 김정은 위원장은 17일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어 코로나19 전파상황을 점검하고 주민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주문했다. 김 위원장은 회의에서 "건국 이래 처음으로 맞다든 방역 시련의 초기부터 발로된 국가의 위기대응능력의 미숙성, 국가지도간부들의 비적극적인 태도와 해이성, 비활동성은 우리 사업의 허점과 공간을 그대로 노출시켰다"면서 "생활 보장과 생활물자 공급을 더욱 짜고들고 주민들의 치료수요와 조건을 최대한 보장해주기 위해 각방의 노력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신홍철 주러 북한 대사도 이날 이고리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무차관을 만났다. 의약품 지원 등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외무부는 "코로나19 확산 대응과 관련한 러-북 협력 전망을 포함한 양국 관계 현안들이 논의됐다"고 밝혔다.

북한 매체들은 이날 16일 오후 6시부터 17일 오후 6시까지 전국적으로 23만2880여명의 코로나19 관련 발열환자가 발생하고 20만5630여명이 완치됐으며 6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지난 4월 말부터 17일 오후 6시까지 발생한 발열환자 총수는 171만5950여명이며, 그 중 102만4720여명이 완쾌되고 69만1170여명이 치료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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