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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아이티 지진 1억 구호품, 배송비만 1억…9개월째 발동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8월 14일(현지 시간) 규모 7.2의 강진으로 무너진 아이티 남서부 항구도시 레카예의 한 호텔. AP연합뉴스

지난해 8월 14일(현지 시간) 규모 7.2의 강진으로 무너진 아이티 남서부 항구도시 레카예의 한 호텔. AP연합뉴스

지난 17일 오후 부산 사하구 감천동 삼성여고 운동장. 한쪽 편에 1TEU(가로·세로 2.4m, 높이 8m) 크기의 흰색 컨테이너 3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잠긴 문을 열자 단단히 봉해진 여행용 가방과 종이상자가 컨테이너 안에 빼곡했다. 상자엔 매직펜으로 '어른 운동화 30개', '종이컵 1000개', '피아노' 등 글씨를 써 내용물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놓았다. 운동장을 지나 들어선 학교 소강당에도 어른 키를 훌쩍 넘길 만큼 쌓인 물품 상자가 실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지진 피해 아이티 지원…시민·학생이 모은 정성인데…."

아이티로 보내기 위해 모은 구호물품이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 컨테이너에 쌓여있다. 김민주 기자

아이티로 보내기 위해 모은 구호물품이 부산 삼성여고 운동장 컨테이너에 쌓여있다. 김민주 기자

학교 측은 이 물품들이 지진 피해를 겪은 아이티에 '부치지 못한 화물'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8월 14일 규모 7.2 강진이 아이티 전역을 강타한 일과 관련한 지원품이다. 당시 지진으로 1300명이 숨지고 5700명이 다쳤으며, 3만여 가구가 집을 잃었다.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의 피해가 수습되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강진을 맞아 피해가 더 컸다.

삼성여고와 삼성중 학생들은 이 소식을 듣고 아이티에 보낼 구호 물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2010년 대지진 때도 구호 물품을 모으는 데 고사리손을 보탰다. 삼성여고 관계자는 "2010년에는 학생들이 쓴 위로와 응원의 편지 등도 동봉했다"며 "이번에는 학생들이 낸 물품이 많지는 않지만 필기구, 담요 등 또래 친구들에게 필요할 만한 물건을 마음을 담아 모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로 선박 물류비 폭등…성품 발 묶여

구호물품 모집을 주도한 건 부산소망성결교회 원승재(75) 목사다. 원 목사는 2010년 대지진 때 구호 물품 전달 및 봉사활동을 위해 아이티에 방문했다. 그는 이때 맺은 인연으로 30여차례 아이티를 오가며 수도 포르토프랭스에 '희망기술학교'를 세웠다. 직업교육 받은 아이티 국민을 우리나라 기업과 연결해주는 활동도 해왔다.

아이티로 보낼 예정이었던 구호물품이 부산 삼성여고 강당에 쌓여있다.

아이티로 보낼 예정이었던 구호물품이 부산 삼성여고 강당에 쌓여있다.

원 목사는 "지진 소식을 듣고 부산시로부터 3억원 규모의 성품 모집 허가를 받아 학생과 시민, 기업인 등으로부터 1억2000만원 상당의 성품을 모았다"고 말했다. 신발 3만 켤레와 의류 5만벌, 피아노 3대를 포함해 자전거, 의약품과 각종 생필품이 컨테이너에 담겼다. 전북 군산 중동교회에서는 성품을 아이티로 보내는 데 써달라며 2000만원을 보내왔다.

부산에서 신발공장을 하는 A씨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새 신발 1000켤레를 아이티에 전할 성품으로 내놨다. 그는 "물류비가 올라 주변 사업자들도 영향을 받고 있지만 성품마저 물류비 탓에 전달이 어려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당초 성품은 부산항에서 배편을 통해 지난해 10월쯤 아이티에 보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코로나19 여파로 화물선 물류비가 폭등한 탓에 9개월째 발이 묶였다. 원 목사는 "어렵사리 1억2000만 원어치 성품을 모아놓고 보니 보내는 비용만 1억원이 필요했다"며 "부산시 등에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방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볼 때마다 마음 아파… 전할 방법 없을까요?" 

아이티로 보낼 예정이었던 새 운동화.

아이티로 보낼 예정이었던 새 운동화.

삼성여고 학생들은 운동장에 놓인 컨테이너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을 추스른다고 했다. 3학년 김소진(18)양은 "우리 학교와 삼성중 후배들은 물론 뜻 있는 시민이 어렵게 모은 정성이 방치되는 듯해 등·하교 때 컨테이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며 "아이티에는 여전히 구호 물품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많은 만큼 하루빨리 성품이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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