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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인으로 산다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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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백일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백일현 산업팀 차장

백일현 산업팀 차장

지난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기업 총수 명단을 정리하다 발견한 사실 하나. 10대 그룹 중 총수급 인사가 안 나타난 기업은 딱 두 곳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최근 한 달 사이 긴급 사장단 회의를 연 곳이었다. 두 기업은 금리 인상, 원자재 가격 폭등 등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 때문에 사장단이 모여 “비상 계획을 수립하자” “앞으로의 위기는 그간의 위기와 차원이 다를 수 있다. 워스트 시나리오까지 검토하자” 목소리를 냈었다.

물론 그런 위기감 때문에 총수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지 않은 건 아니라고 한다. 한 곳은 초청장이 전달 안 됐다 하고, 또 다른 곳은 초청은 받았지만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는데 어찌 됐든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한국은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35차례나 언급했던, ‘자유’로운 나라니까.

그와 별개로 최근 기업들이 처한 상황은 안쓰럽다. 미국발 물가 쇼크에 외국인 매도로 코스피가 주저앉고 원화 가치가 떨어지고 스태그플레이션 공포는 짙다. 우크라이나 사태와 중국 도시 코로나19 봉쇄, 공급망·물류 대란 파고도 높다.

여기까진 어쩔 수 없는 글로벌 변수라 쳐도, 정권교체기 한국만의 이슈는 더 많다. 요새 한국 기업인은 챙겨야 할 게 많아도 너무 많다. 우선 총수나 최고경영자(CEO)급이 나가 얼굴도장을 찍어야 하는 각종 정부 행사가 이어진다.

인맥 관리도 빠뜨릴 수 없다. 발 빠른 기업은 이미 대통령과 인연 있는 인물, 대놓고 검찰 출신들을 사외이사 감으로 찾아 선임을 끝냈다. 앞서 현직이던 대기업 사외이사들이 최근 장관으로 여럿 입각한 걸 보면 역시 기업들의 인재 보는 눈썰미는 알아줘야 한다.

그뿐인가. 새 정부가 규제를 풀고 세금도 줄이도록 여러 경제단체를 통해 관련 연구도 쏟아내야 한다. CEO 위축시킨다는 중대재해처벌법도 개정하고 주52시간제도 완화하고 법인세도 줄여야 하니 말이다. 고차 방정식은 더 있다. 복합 경제 위기 상황에서 새 정부 국정 과제에 맞춘 투자 보따리 풀기, 일자리 창출안 내놓기가 그렇다.

자의 반 타의 반, 이전 정부서 코드 맞추기로 했던 사업은 향후 어떻게 할지도 정해야 할 터. 한 기업 임원에게 “○○사업, 새 정부서 힘 빠지면 어쩌나”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큰 걱정 안 합니다. 새 정부 국정 과제에 들어간 사업도 투자해서요.”

다른 나라에서도 기업인들의 정권 눈치 보기는 피할 수 없겠지만, 요새 특히 심한 한국 기업의 노골적 줄서기, 보험용 행보는 낯 뜨겁다. 수많은 국민의 일자리 주체인 기업이 좀 더 당당했으면 한다. 친기업을 외치는 새 정부도 말로만 부르짖지 말고 기업인들, 꼭 필요한 일에만 부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