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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하르키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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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영익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한영익 정치에디터

한영익 정치에디터

우크라이나 북동부에 있는 제2의 도시 하르키우는 한국인에게 낯선 도시다. 유서 깊은 수도 키이우와 직항로가 연결돼 있지 않았던 만큼, 넘버 투 도시가 생소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 “우리와 아무 관계 없는 지구 반대편 나라”라고 했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는 한국과 인연이 전혀 없는 곳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유일의 고려인 학교가 이곳에 있다.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총 3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스탈린에 의해 강제로 이주당한 이들과 그들의 후손이다. 하르키우가 6·25 전쟁 초기 국군을 패닉으로 몰아넣었던 ‘T-34’ 전차의 주요 생산기지였다는 점에서 악연도 있던 곳이다.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의 삶만큼이나 하르키우란 도시도 근·현대사에서 부침이 많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과 나치독일은 이 도시에서만 네 차례나 대규모 공방전을 벌였다. 규모가 컸던 건 1942년과 1943년 전투다. 1942년 소련은 쾌속 진격하던 독일군을 막아내기 위해 하르키우에서 선공했지만, 결국 독일군의 역습에 무너졌다. 하르키우를 빼앗긴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까지 밀렸다.

1943년에는 소련이 공격에 나섰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 40만 명을 포로로 잡은 소련이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소련이 하르키우까지 진격해 오길 기다렸다가 역습에 나섰다. 소련의 진격은 늦춰졌다. 여러 차례 공방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하르키우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하르키우는 소련이 해체된 뒤에도 정치적 혼란기를 겪었다. 2014년 유로마이단(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 가입을 요구한 시위) 당시 혼란의 한가운데 있었다. 하르키우는 친러파와 친서방파의 대결 정국에서 친러 정치인 야누코비치의 지지 기반이기도 했다. 러시아 국경까지 불과 50㎞밖에 떨어져있지 않아 러시아계 시민도 다수 거주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하르키우는 또 한 번 화마에 휩싸였다. 전쟁 초기부터 하르키우 대학교와 시청사 등이 러시아군의 무차별 폭격을 당했다. 석 달째 치열한 전투 끝에 우크라이나 당국이 하르키우에서 러시아군을 완전히 몰아냈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국경까지 도달한 군인들이 “우리가 해냈다”는 메시지도 보냈다. 하르키우가 평화를 찾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