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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승마하는 바둑소녀 김은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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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대국 중 AI를 보다 징계를 받은 김은지는 제주도에서 말을 타며 시련을 극복했다. [사진 김은지]

대국 중 AI를 보다 징계를 받은 김은지는 제주도에서 말을 타며 시련을 극복했다. [사진 김은지]

15세 바둑소녀 김은지가 조용하지만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1년의 시련 속에서 더 강해져 돌아왔다. 아시안게임 선발전 결선 무대에선 조승아·오정아·박지연 등 여자바둑의 강자들에게 6전 6승을 거두며 관문을 통과했다. 최정·오유진·김채영에 이어 한장 남은 티켓을 차지했다. NH 여자바둑리그에서는 섬섬여수팀의 주장(1지명)으로 선발됐다. YK건기배에서는 최강 신진서를 잠시 고전에 빠뜨리기도 했다. 크게 달라진 김은지의 바둑이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무엇보다 승부 호흡에 여유가 생겼다.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은지는 13세였던 2020년 11월, 대국 중 AI를 봤다가 자격정지 1년의 징계를 받았다.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스승인 장수영 9단을 통해 어머니에게 연락했다.

은지는 주말에 청주에서 말을 타고 있었다. 동행한 어머니 김연희씨는 “은지는 천성이 겁이 없다. 말을 타고 산과 들, 호숫가를 달리는 것을 참 좋아한다”고 말했다. 1년 징계는 큰일이자 큰 상처였다. 징계를 받자마자 제주도로 갔고 그때 말을 배웠다. 이렇게 접한 승마가 힘든 시기에 은지의 건강과 정신을 지켜줬다. “참 고마운 심정”이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체력과 집중력도 좋아졌다. 승마가 힘든 시기를 넘길 수 있게 도와줬고 보너스까지 안겨준 것이다.

은지는 어릴 때부터 ‘바둑 영재’로 이름나 TV 카메라가 쫓아다녔다. 바둑에 올인하며 다른 것은 쳐다본 적이 없었다. 홈스쿨링을 하며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다. 그런 은지가 1년 쉬는 동안 모처럼 바둑과 멀어졌다. 독서에 푹 빠져 어떤 때는 하루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처음 사회를 접했다. 학교에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중학생 나이라 초등학교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금방 합격했다. 중학교 검정고시도 곧 준비할 예정이다.

은지는 이기면 웃고 지면 울었다. 그만큼 승부근성이 강했고 한편으로는 집착이 지나쳤다. AI 사건도 이 연장선에 있다. 요즘엔 대국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좋고 고마운 심정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고 나와도 덤덤한 모습이다. “참 많이 컸어요”라고 어머니 김연희씨는 말한다. “정말 많이 컸어요.”

은지는 아직 휴대폰이 없다. 백해무익하다는 어머니의 주장을 받아들여 휴대폰을 갖지 않고 있다. “은지에 대한 기사를 보면 너무 칭찬 일변으로 포장돼 있거든요. 그걸 휴대폰으로 보면 은지가 자만심이나 착각에 젖을 수 있고….”

학교에 다니지 않고 휴대폰도 없는 은지는 자연 친구가 거의 없다. 너무 어려서 도장에 다녔고 곧장 프로가 됐다. 그래서 언니는 있어도 친구는 없다.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유일한 상대는 어머니뿐이다. 사회생활이라고 한다면 ‘대국’과 ‘훈련’이 전부다. 한국기원 국가대표 내에 청소년대표가 있고 거기서 함께 훈련한다. 바둑은 말이 없어도 되기에 별로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런 은지에게 1년의 휴식은 좋은 약이 됐다. 바로 바둑 밖의 세상에 눈뜨게 된 것이다. 넓고 큰 또다른 세상엔 다른 사람도 많이 산다는 걸 배운 것이다.

은지는 ‘까칠한 재석이’ 시리즈 책을 읽고 이런 독후감을 남겼다.

“6살 때부터 바둑만 공부하며 살아온 나는 친구의 소중함이나 필요성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학교에 다니지 않고 또래 친구가 없는 나에게 이 책은 친구와 관계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으며 내가 힘든 시기에 이 책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도 진정한 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바둑소녀 김은지의 변화는 1년 징계로부터 시작되어 승마와 독서, 그리고 친구로 이어진다. 성장이란 누구에게나 힘들다. 특히 천재들에겐 더 힘들다. 성장을 시작한 김은지에게 행운이 있기를 빌어본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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