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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정부 청사진에 예술이 안 보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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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엔/ 나의 뜨거운 노래는/ 여기 언 땅에 깊이 묻으리./ 아아,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 마침내 비굴한 목숨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에/ 무쇠 연자를 돌릴지라도/ 나의 노래는/ 비도(非道)를 치레하기에 앗기지는 않으리라.// 들어보라/ 이 거짓의 거리에서 숨결쳐 오는/ 뭇 구호와 빈 찬양의 헛한 울림을./ 모두가 영혼을 팔아 예복을 입고/ 소리 맞춰 목청 뽑을지라도/ 여기 진실은 고독히/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한국시인협회 초대 대표인 청마 유치환 시인은 1960년 3·15 부정 선거가 저질러지기 직전에 이 시를 발표합니다. 1957년 한국시협이 창립되자 대표에 취임한 청마는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준열한 비판 정신을 견지하며 시협을 이끌었습니다. 4·19를 예언한 듯한 이 시에는 청마가 지니고 있는 준열한 정신, 고고한 예언자적 자세가 잘 드러납니다.

편향적 문화기관 쇄신돼야
기초 예술은 국민정신 형성
용산공원에 시인의 광장을

그해 5월 27일, 청마의 뒤를 이어 대표로 선임된 조지훈 시인도 청마의 현실비판적인 시들이 발표되던 즈음에 ‘지조론’을 발표해 “한때의 적막을 받을지언정 만고에 처량한 이름이 되지 말라”고 갈파했으니 이 시대의 한국시협은 양심 세력으로서 진리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 있던 의로운 단체였다고 하겠습니다.

새 정부의 청사진에 예술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우리나라가 갖고 있는 예술의 국제적 위상에 비춰볼 때 국정의 다른 분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보인다는 비판일 것입니다. 예술은 국민의 정신세계를 형성하는 영역입니다. 형이상(形而上)의 세계입니다. 진정한 국력은 그 나라 국민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정신의 수준에 따르는 것입니다.

언론인 정중헌씨는 ‘대한언론’ 5월호에 “무엇보다 기초 예술의 체질을 강화하면서 전문 예술과 생활 예술을 활성화하고 예술인의 창작욕과 자부심을 북돋워 주는 정책 수립과 재원확보가 급선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한 “좌편향된 문화기관 인적 쇄신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이 약속한 청년 일자리 창출이 예술계에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고 했습니다.

지난 정권 때, 문화계의 인사와 지원이 지나치게 편향적이었다는 지적이 많았었다는 점에서 그 실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검토 분석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술인들에 대한 지원도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핀셋 지원이 필요합니다. 우리 곁에는 아직도 기초 생계 해결도 안 돼 극단적인 상태에서 허덕이는 예술인들이 있습니다.

윤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집무실이 용산으로 옮겨졌습니다. 관저는 한남동으로 갑니다. 미군으로부터 돌려받는 공간은 시민공원으로 조성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보며 시민공원에 시인의 광장을 조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광장이라고 해서 넓은 공간을 요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민공원 한 모퉁이에 소형 무대와 100석∼200석 정도의 객석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시민들이 많이 찾는 주말이나 공휴일, 시인의 광장에서 시인들이 자작시를 읊고, 시 낭송가들은 명시를 낭송하고, 성악가들은 시를 가사로 한 가곡을 노래하고, 시인들이 자신의 시와 인생에 대해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면 용산 시민공원이 하나의 브랜드를 가지면서 시민들에게 격조 높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대통령도 시간이 나면 시인의 광장에 와서 시민들과 함께 시 프로그램들을 관람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소통의 공간이 될 것입니다. 윤 대통령 내외가 취임 첫 주말에 백화점과 시장 나들이를 하는 것을 보며 해보는 생각입니다. 만일 시인의 광장 프로그램이 좋다면 유튜브 등으로 중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문화 예술은 특수한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이 향수할 수 있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시의 나라입니다. 까마득한 고조선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로부터 시조(時調)에 이르기까지 조상들은 시를 노래하는 것이 일상이다시피 하였습니다. 삼국지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우리 조상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즐긴다 하였으니, 그야말로 낭만적인 민족이었던 것이지요. 그 유전자가 오늘에 이어져 세계에 K팝과 K컬처 열풍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른 것 아니겠습니까. 시는 모든 예술의 기초라는 점에서 시의 생활화가 예술 진흥의 진정한 핵심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용산 시인의 광장은 작지만 큰 상징성을 갖게 되는 것이지요. 가성비 높은 문화 사업이 되지 않을까요. 새 정부는 시에 공간을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