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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두수가 고발한다

취임식 갔던 노동자가 말한다 "尹정부 '삽질' 제대로 해봅시다"

중앙일보

입력

이두수 작가, 건설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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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영옥 기자

그래픽=김영옥 기자

지난 10일 20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영광을 얻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지방의 숙소가 바뀌는 바람에 대통령취임행사위원회로부터 온 초청장을 출발 당일에서야 받았다. 일용직 건설노동자가 국가 원수 취임식에 초청받은 건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흔하지 않은 경험인 게 틀림없다. 이틀 치 일당이 날아가더라도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공사 현장인 전남 나주에서 가야 했기에 취임식 하루 전날 주최측이 준비한 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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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완연한 봄날이었다. 남북을 잇는 고속도로변의 가로수로 심어 놓은 꽃나무들로 온통 꽃 천지였다. 그중에 이팝나무가 단연 눈에 들어왔다. 과거 우리나라는 보리 이삭이 패는 바로 지금 이때가 보릿고개라고 불린 가장 먹고살기 힘든 시기였다. 풀뿌리로 연명해야 했다. 우리 선조들은 그 시절 이팝나무의 흰 꽃들에게 쌀밥(이밥→이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것이 밥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은 배를 곯아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계절의 여왕 오월. 화창한 날씨를 보인 9일 대전 유성온천 문화의 거리를 찾은 시민들이 흰 눈이 내린 것처럼 활짝 핀 이팝나무 꽃을 감상하며 산책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새하얀 꽃이 마치 흰 쌀밥(이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계절의 여왕 오월. 화창한 날씨를 보인 9일 대전 유성온천 문화의 거리를 찾은 시민들이 흰 눈이 내린 것처럼 활짝 핀 이팝나무 꽃을 감상하며 산책하고 있다. 이팝나무는 새하얀 꽃이 마치 흰 쌀밥(이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프리랜서 김성태

취임식 날 아침, 남산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들은 오늘이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관심하게 자기의 일터로 향했고 나는 취임식장인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이미 식장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와 있었다. 선물교환권이 있어 기대했는데, 마스크와 종이부채여서 잠깐 실망했다.

용이 될 수 없다던 문재인 정부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 이번 취임식의 캐치프레이즈다. '다시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일까. 여전히 사림 양반이 지배하는 후조선 사회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문재인 정부와 달리 진짜 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나라, 자유민주주의라는 국체를 다시 생각해보자는 그런 의미 아닐까. 윤 대통령이 대선 기간 중 강조했던 원칙과 상식이 통용되는 나라라는 것도 결코 어렵거나 힘든 말이 아니다. 긴 설명도 필요 없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일한 만큼 보상받고, 죄를 지으면 벌 받는 사회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조국 전 법무부 장관 트위터)며 우리는 끼리끼리 대대손손 특권을 누릴 테니 가진 것 없는 너희는 개천에서 계속 붕어·개구리·가재로 살라는 식으로 국정을 운용했던 전 정권과 달리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앞서 서울로 이동할 때 버스 안 TV에서 본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자유와 시장경제를 중시하겠다는 이번 정권에 어떻게든 흠을 내보겠다는 과욕에 오히려 큰 망신만 당한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이 참 유치하다 싶었다. 한 후보자 앞에서도 특권의식을 여과없이 내비쳤던 민주당 사람들이 별로 가진 것 없는 평범한 국민을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을지 절로 그려졌다. 그랬던 한 시대가 막을 내렸다.

미사여구 없어 신선한 취임사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식전행사로 축하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성룡 기자

제20대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식전행사로 축하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런 생각을 줄곧 염두에 두고 행사를 지켜봤다. 식전 행사로는 학생과 청년, 그리고 장애인의 공연이 있었다. 유명가수 공연 같은 특별한 쇼는 없었다. 본행사에서도 윤 대통령은 20명의 의인과 함께 단상에 올랐다. 의인이라 부르지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기 분야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열심히 한 사람들이었다.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더 울림이 있었다.

취임사도 마찬가지다. 식전 행사처럼 소박하고 간단했고 명료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치와 시장경제를 중심으로 조국의 번영과 발전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리고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자유의 가치라는 인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는 나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약속했다. 화려한 미사여구나 감동을 일으킬 구호가 없는 담백한 연설문은 오히려 신선한 자극이었다. 지난 5년 동안 들어온 강한 조미료 같은 정치구호에 얼마나 식상했는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도 있다. 취임사 서두에서 윤 대통령은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솔직히 이 말이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나라라고 했으면 혹시 와 닿았을까. 아니다. 국민이나 노동자 같은 집단 명사에서 벗어나 '나'라는 한 개인으로 대신했으면 어땠을까.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보다 내가 주인 되는 나라. 자유 가치 실현에 역점을 둔다면 개인에 방점을 둬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노동자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노동자인 내가 행복해야 진짜 행복한 사회다.

[그림 이두수]

[그림 이두수]

나는 거창한 노동정책은 모른다. 다만 나 같은 건설현장 노동자도 일을 끝내고 독서를 하거나 각자의 취향대로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런 환경이라면 정치구호가 난무하는 노조 활동보다 나 자신의 능력을 높이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노동자들의 인문학적 교양이 높아지면 노동현장의 안전문제도 따라서 높아진다고 확신한다. 노동현장에서의 안전문제는 노동자 자신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게 평소 내 소신이다.

법과 규제로 안전해지지 않아 

공사현장에서 일해보면 노동자 본인의 각성 없이 법이나 규제만 늘린다고 안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걸 매일 느낀다. 안전해지기는커녕 오히려 현장 분위기만 우울해진다. 지난 정부가 중대재해법을 만드니 우리 현장에도 안전요원이 늘어났다. 간섭은 많아졌는데 전보다 안전해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그저 작업능률만 떨어졌다. 이런 쓸데없는 비용을 생각하면 차라리 신나서 일하도록 인센티브를 주는 게 훨씬 효과가 좋다. 가령 연간 무재해 노동자에게 일당 몇 퍼센트를 포상금을 준다거나 공제금을 높여주는 식의 동기부여를 해주면 작업현장은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분위기로 바뀔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 "우리 사회가 분열되어 양극화되는 것은 반지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하지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지성은 좋은 대학 나오고 고위직에 오른다고 쌓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상적인 말만 늘어놓고는 현실 속에선 극심한 언행 불일치를 보이는 게 요즘 지성인이라 자처하는 사회 리더들의 모습 아닌가. 학문이나 인격을 갈고닦는다는 뜻의 절차탁마(切磋琢磨·자르고 깨고 쪼고 가는 행위)라는 말은 노동에서 나온 말이다. 이 말뿐만 아니라 이른바 지성인들이 즐겨 쓰는 적잖은 말이 노동현장에서 만들어졌다.

우리 사회 리더는 물론이요 노동현장의 사람들까지 절차탁마하는 마음으로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다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깊이 있는 지성 사회가 될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그러면 굳이 누가 요구하지 않아도 노동현장에서 붉은 깃발 휘날리며 외치는 ‘타도하자, 몰아내자’는 구호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현장이 만들어지면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봄날이다.

참, 사람들이 많이 쓰는 노동 관련 단어 중에 삽질도 있다. '쓸데없는 짓 한다'는 비아냥 섞인 말이라는 걸 알지만 보통 사람은 물론이요 "노동이 신성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쓸 말은 아닌 거 같다. 진짜 삽질 좀 해본 사람에겐, 삽질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