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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출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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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의회 제도가 일찍 발달한 영국에서 왕과 귀족 사이에 가장 큰 마찰은 세금이었다. 1215년 6월 귀족에게 밀린 존 왕은 ‘영국 헌법의 성경’으로 불리는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 도장을 찍었다. 귀족 전체 회의 승인 없이 군역대납금·특별보조세 같은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겼다. 국법에 따른 과세의 초석이다.

이후 왕들은 이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고 마찰은 여전했다. 절대 왕권의 상징인 엘리자베스1세가 1603년 미혼으로 숨을 거둔 후 먼 친척인 제임스 왕이 등극했다. 귀족들은 정통성을 빌미로 그를 무시했다. 제임스 왕은 다양한 이유로 귀족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두는 방법으로 맞섰고, 귀족들은 이에 강력히 저항해 ‘의회특권법’을 제정했다. 왕이 자의적으로 귀족(의원)을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법이다. 불체포특권의 시초다.

한국에선 1948년 제헌국회부터 불체포특권이 이어졌다. 헌법 44조에 ‘국회의원은 현행범인인 경우를 제외하고 회기(개회일~폐회일) 중에 국회 동의 없이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다’고 명시됐다. 이 법은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는 야당 의원의 국회 활동을 보장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런데 이 법을 ‘범죄특권’으로 악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일단 당선돼 당장 처벌을 피하고 시간이 지나 수사가 유야무야하길 기다리는 식이다.

이재명 민주당 상임고문이 ‘방탄출마’ 논란에 휩싸였다. 그는 대선 패배 이후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역대 후보와 달리 대선 58일 만에 연고가 없는 지역의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경찰이 ‘성남 FC 후원금’ 관련해 성남시청을 압수수색한 지 4일 만이기도 하다. 이 고문 관련 의혹은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 ‘법인카드 유용’ 등도 있다.

여당은 “불체포특권 포기를 선언하라”고 압박하고 야당은 “이재명 죽이기”라고 맞서고 있다. 불체포특권을 포기해야 할 대상이 비단 이 고문만은 아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온갖 의혹이 난무하지만, 불체포특권 뒤로 피해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불거진 의혹에 대해 일반 국민처럼 수사를 받으라는 주장에 그들이 펄쩍 뛰는 모양새는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수사가 진행되면 안 될 이유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