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유시인 정태춘 “포크 못 만났다면 내 이야기 못 풀었겠죠”

중앙일보

입력 2022.05.1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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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7면

다큐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뭉친 16년지기 고영재 감독(왼쪽)과 가수 정태춘씨를 지난 9일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다큐 ‘아치의 노래, 정태춘’으로 뭉친 16년지기 고영재 감독(왼쪽)과 가수 정태춘씨를 지난 9일 만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엄혹한 시절 미군기지가 있던 경기도 평택 시골에서 나지 않았다면. 중학교 현악반에 들어가 바이올린을 배우지 않았다면. 사회의 아픔에 몸서리치지 않았다면. 정태춘(68)이 지금의 ‘음유시인’ 정태춘일 수 있을까. 또 만약에, 그가 포크음악을 만나지 못했다면.

“포크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이야기를 노래로 풀 수 있었을까. 중요한 지적이죠. 다행히 포크가 말할 수 있는 길을 터줬어요. 처음에 노래 만들 땐 내가 살고 있던 시골 주변 이야기를 많이 했죠. 대중가요가 주로 취급하는 사랑·이별 이런 게 아닌, 내 이야기를 한 것도 포크여서 가능했죠. 반주에 구애받지 않고, 내 기타 하나만 들고 노래할 수 있었으니까요.”

음악인생 40년을 되짚은 다큐멘터리 ‘아치의 노래, 정태춘’(감독 고영재) 개봉(18일)을 앞둔 정태춘의 말이다. 이번 다큐는 그가 아내 박은옥(65)과 함께한 40년 발자취를 기념한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2019)에 맞춰 2018년부터 3년간 촬영한 것이다. ‘워낭소리’(2009) 등 다큐멘터리 제작자 고영재(53) 프로듀서가 제작하고 연출까지 맡았다. 두 사람은 2006년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운동 때 처음 만난 16년 지기다. 두 사람을 9일 서울 마포구 ‘문화예술기획 봄’ 사무실에서 만났다.

정태춘은 “40주년 프로젝트 때 참여한 사람들의 열기와 헌신적인 모습을 보며 ‘나를 다 내놓고, 소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과정들이 영화에 담겼다”고 지난달 간담회에서 말했다. 대학 시절 ‘떠나가는 배’로 정태춘을 처음 알았다는 고 감독은 “거창하게 연대기를 훑기보다 스토리가 있는 콘서트로 영화를 봐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1980년대 국악 등을 시도한 2, 3집 음반이 흥행 실패하고 록이 가요계를 장악하자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전국 순회 공연 ‘얘기 노래마당’을 통해 대중과 소통을 이어갔다. [사진 NEW]

1980년대 국악 등을 시도한 2, 3집 음반이 흥행 실패하고 록이 가요계를 장악하자 정태춘·박은옥 부부는 전국 순회 공연 ‘얘기 노래마당’을 통해 대중과 소통을 이어갔다. [사진 NEW]

다큐는 1978년 자작곡 ‘시인의 마을’ ‘촛불’로 데뷔해 ‘MBC 10대 가수 신인상’을 받은 정태춘의 초기부터, 청계피복노조 일일 찻집 참여를 계기로 노동운동, 고문 및 정치폭력 희생자를 위한 모금공연,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등 대형집회 무대에 섰던 모습을 담았다. 또 대중가요 사전심의검열제도에 맞서 7집 ‘아, 대한민국…’을 불법 발매했던 90년대 등을 대표곡 28곡과 함께 되짚었다.

‘떼창’을 유도할 만큼 선곡이 풍성한데.
▶정태춘(이하 정)=“유명인의 음악영화를 더러 봤을 때 기대한 만큼 노래가 길게 안 나오더라. 고 감독은 좀 무리한 거 아닌가, 할 정도로 넣었는데, 좋았다.”

▶고영재(이하 고)=“실제 ‘싱어롱(따라부르기) 상영’ 요청이 많다.”

28곡은 어떻게 골랐나.
▶고=“영화다 보니 내러티브, 시각화가 중요해서 노래가 좋아도 아깝게 빠진 곡도 있다. 제게 영향이 컸던 곡이나 대중적으로 알려진 곡도 넣었다. 1집부터 음반마다 한 곡씩은 넣었다.”

앨범 ‘아, 대한민국…’에 실린 ‘우리들의 죽음’은 가난한 맞벌이 부모가 일 나간 새 잠긴 지하 셋방에서 불이 나 어린 남매가 연기에 질식사한 사건을 당시 신문기사와 죽은 남매의 1인칭 시점 가사로 만든 슬픈 곡이다. 고 감독은 다큐에 이 곡을 부른 정태춘·박은옥 공연 실황을 거의 자르지 않고 담았다. 영화 속 독립된 소공연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현실을 노래한 가사를 사전심의해 ‘고쳐라’ ‘잘라라’ 하는 검열제도에 그는 반기를 들었다. “내가 ‘시인의 마을’로 1978년 처음 데뷔할 때 정부기관 사전심의를 넣는데 OK를 안 해줘서 레코드사 사장님이 (가사를) 고쳐서 첫 앨범이 나왔어요. 검열 기관에선 ‘정태춘 씨, 대중음악이 이런 얘기 해야 합니까? 건전한 얘기 하면 안 됩니까?’ 그랬죠. 그런 것들이 창작에 방해가 됐어요.”

수줍은 성격의 청년 정태춘은 어떻게 불의에 맞서는 투사가 됐나.
▶정=“스스로의 믿음과 연대감이다. 그렇게 지낸 (젊은 시절) 10여년간 활동 속에 내가 택한 방향성, 진정성 있는 음악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점검하며 추호의 의심이 없었다.”

영화엔 정태춘의 팬들 사연도 담겼다. 청소년 인권활동가 이수경씨는 2017년 광화문 촛불시위 당시 “어떤 할아버지가 노래를 부르는” 걸 봤다. 정태춘이었다. 이씨는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라는 가사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듣고 고 백남기 농민의 비극이 과거부터 반복돼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반면 5·18 민주화운동을 되짚는 정태춘을 향해 “노래를 들으러 왔지, 당신의 이념을 들으러 온 게 아니다”라며 콘서트장을 박차고 나간 관객도 있었다.

‘당신에게 노래란 뭘까’란 질문에 정태춘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당대 사회에 좀 부적응했던 사람이에요. ‘그게 내 적응력이 부족해서인가’ 고민하며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요. 발전하고 성장하고 부유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불편한 사람은 왜 그럴까, 생각하는 거죠. 결국은 그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고 감독은 지금 정태춘 다큐를 내놓는 의미를 이렇게 밝혔다. “사회의 말들이 날카롭고 알맹이 없고 험해지는데, 이 영화가, 정태춘 음악이, 뒤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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