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인들도 오해하는 '최초의 인류'...'심청전'에 나온 의외 힌트 [백성호의 예수뎐]

중앙일보

입력 2022.05.14 05:00

업데이트 2022.05.1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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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예수는 울어대는 바람과 날뛰는 호수를 향해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했다. 영어로는 “Be silent! be still!”이다. 단순히 파도의 어깨를 두드려서 잠시 진정시키는 것이 ‘be silent’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삶의 고요를 만들 수가 없다. 예수가 말한 삶의 고요는 그보다 더 크고 더 깊다.

왜 그럴까.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보기 때문이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보기 때문이다. 그럴 때 드러나는 고요는 더없이 크고 무한히 깊다.

갈릴래아 호수에 폭풍이 몰아칠 때 예수는 배 안에서 쿨쿨 잠들어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중앙포토]

갈릴래아 호수에 폭풍이 몰아칠 때 예수는 배 안에서 쿨쿨 잠들어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중앙포토]

(46)성경이 말하는 최초의 인류, 출발선은 어디일까

마르코 복음서(마가복음)의 영어 성경을 보면 ‘고요의 정체’가 더욱 명확해진다. 예수가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하자 “아주 고요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어로는 “there came a great calm”이다. 단순한 고요가 아니다. ‘거대한 고요(a great calm)’다. 그리스어 성경에는 ‘galene(calm) megas(great)’로 되어 있다.

세상의 고요가 모두 ‘거대한 고요’는 아니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볼 때 비로소 ‘거대한 고요’가 밀려온다.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볼 때 비로소 ‘거대한 고요’가 드러난다. 그때 우리 삶도 잠잠해진다.

『심청전』의 바다도 갈릴래아(갈릴리) 호수와 통한다. 심 봉사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다. 그에게 세상은 어둠이다. 심 봉사는 처음부터 장님은 아니었다. 그는 황주 땅 도화동의 이름난 유학자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 병에 걸려 장님이 되었다.

무슨 뜻일까. 본래부터 어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처음에는 빛이 있었다. 그러다 어둠이 되었다. 그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캄캄한 어둠 속에도 빛이 들어 있다. 다만 어둠이 빛을 보지 못할 뿐이다.

갈릴래야 호수는 바다라고 불릴 만큼 규모가 크다. 요즘도 그 호수에 폭풍이 불 때가 있다. [중앙포토]

갈릴래야 호수는 바다라고 불릴 만큼 규모가 크다. 요즘도 그 호수에 폭풍이 불 때가 있다. [중앙포토]

파도는 어디에서 생겨날까. 그렇다. 바다에서 생겨난다. 그래서 바다와 파도, 둘의 속성이 하나다. 그런데 바다에서 툭 떨어져 공중으로 솟구친 파도는 바다를 잊어버린다. 자신이 어디에서 생겨났고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망각한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OO’, ‘이XX’, ‘박△△’라는 이름의 한 조각 파도가 되자마자 바다를 잊고 만다. 그들의 세상에는 바다는 없고 파도만 있을 뿐이다.

심청전의 서사도 그렇다. 심청도 그랬다. 심청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었다. 무슨 뜻일까. 파도는 바다에서 툭 튀어나오자마자 바다를 여읜다. 자신이 태어난 근원을 상실한다. 어머니를 잃은 심청이 그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파도는 두렵다. 불안하고 겁이 난다. 폭풍이 몰아칠 때는 더하다. 사라질까 봐, 죽게 될까 봐 파도는 덜덜 떤다.

예수의 눈에는 그 이유가 빤히 보인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심청전의 서사는 계속 이어진다. 심 봉사는 개울을 건너다 물에 빠졌다. 지나가던 화주승이 구해주었고, “명월당 운심동개법당 부처님께 공양미 300석을 바치면 눈을 뜰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심 봉사는 덜컥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갈릴리의 언덕에서 바라본 호수의 전경이다. 호수 주변의 언덕과 야트막한 산에는 초록이 무성했다. [중앙포토]

갈릴리의 언덕에서 바라본 호수의 전경이다. 호수 주변의 언덕과 야트막한 산에는 초록이 무성했다. [중앙포토]

법당 이름이 눈길을 끈다. ‘개법당(開法堂)’. 개법(開法). 무슨 뜻일까. ‘이치가 열린다’는 뜻이다. 이치가 열릴 때 어둠이 열린다. 그래야 빛이 드러난다. 그것이 ‘개법’이다. 그런데 어둠은 거저 열리지 않는다. 화주승은 공양미 300석을 바치라고 했다. 단순한 금전적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심청의 목숨’을 뜻한다.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보려면 어찌해야 할까. ‘나는 파도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허물어야 한다. 그래서 심청은 중국 난징(南京)을 오가는 뱃사람에게 목숨을 판다. 그것이 십자가다. 어둠이 빛을 찾고, 파도가 바다를 찾기 위해 짊어지는 심청의 ‘자기 십자가’다. 쉽지는 않다. 바다를 모르는 한 조각 파도에게 그것은 죽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심청은 배를 탔다. 배는 서해로 떠났다. 아니나 다를까. 풍랑이 몰아쳤다. 집채만 한 파도가 몰려와 뱃전을 ‘탕! 탕!’ 친다. 큰 배가 휘청휘청한다. 폭풍은 으르렁거리며 달려든다. 심청의 마음이 요동치고 덩달아 파도도 출렁인다. 심청과 파도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자 뱃사람이 외친다. “여보시오, 심 낭자! 얼른 물에 드시오!”

때가 왔다. 파도가 자신을 허물 때가 왔다. 심청은 두 눈을 딱 감는다. 그리고 뱃머리로 달려간다. 심청은 발을 뗀다. 뱃전에서 공중으로 몸이 뜬다. 파도는 그렇게 공중으로 솟구친다. 판소리에서는 그 대목을 ‘기러기 낙수(落水) 격’이라고 묘사한다. 그렇게 떨어진다. 하늘로 솟구친 파도가 바다를 향해, 기러기처럼 거꾸로 곤두박질친다.

‘풍덩!’ 하고 심청이 물에 빠진다.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하늘을 삼킬 듯이 몰아치던 폭풍, 바다를 삼킬 듯이 달려들던 파도가 일시에 가라앉는다. 순식간에 잠이 든다. 방금까지도 ‘으르렁! 쾅쾅!’ 하며 달려들던 기세는 온데간데없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고요가 드러난다. 왜 그럴까. 파도가 바다를 만났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파도가 ‘자기 안의 바다’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 기후인 이스라엘에서 갈릴래아 호수 일대는 일종의 제주도다. 그곳에만 가면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변한다. [중앙포토]

황량하고 건조한 사막 기후인 이스라엘에서 갈릴래아 호수 일대는 일종의 제주도다. 그곳에만 가면 세상이 온통 초록으로 변한다. [중앙포토]

물에 빠진 심청이 용궁을 거쳐 다시 세상으로 나올 때는 연꽃을 타고 나타난다. 왜 연꽃일까. 물에 젖지 않기 때문이다. 연꽃은 폭풍 속에 있으면서도 흔들림이 없고, 파도 속에 있으면서도 물들지 않는다. 그것이 거대한 고요다.

나는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었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파도의 삶은 유한하다. 동양에서든 서양에서든 마찬가지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심청전』에도 갈릴래아 호수가 녹아 있다. 왜 그럴까. 우리의 일상, 우리의 생활, 우리의 삶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이기 때문이다.

그 위에 수시로 돌풍이 불고 파도가 친다. 배가 뒤집힐 듯 기우뚱한다. 갑판으로 파도가 덮칠 때는 죽을 것만 같다. 그때마다 예수는 우리에게 묻는다.

“네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파도인가, 아니면 바다인가.”

갈릴래아 호수 위에 새떼가 줄지어 날고 있다. 2000년 전 예수도 호수 위를 나는 새들의 풍경을 보지 않았을까. [중앙포토]

갈릴래아 호수 위에 새떼가 줄지어 날고 있다. 2000년 전 예수도 호수 위를 나는 새들의 풍경을 보지 않았을까. [중앙포토]

철썩거리는 갈릴래아 호수의 파도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요한복음서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복음서 1장 5절)

“그 바다가 파도 속에서 출렁이고 있지만, 파도는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47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운동장을 한 바퀴 돌때,
우리에게는 출발선이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그 선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왜냐고요?
우리가 다시 돌아올 곳이
바로 그 출발선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출발선이 곧 종착선이 되니까요.

그리스도교에도
이런 출발선이 있습니다.
저는 그걸 잊지 않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첫 출발선을 잊은 채,
한참 더 뒤에 생겨난 엉뚱한 지점을
출발선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런 풍경을 볼 때마다
저는 참 안타깝습니다.

가끔 기독교인에게 묻습니다.
인간의 출발선이 어디냐고.
그럼 이렇게 답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우리도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다.
   그러니 인간의 출발선은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이다.
   거기가 바로 출발선이다.”

이런 식의 출발점은
죄의식으로 범벅돼 있습니다.
최초의 인류가 죄인이라면,
그 출발선에는 어둠 밖에 없습니다.
빛이 없습니다.

저는 달리 봅니다.
첫 출발선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시점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바로 그 시점이라 봅니다.
거기가 본래의 출발선입니다.

신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형상을 본따서 지었습니다.
겉모습을 본딴 게 아니라,
속모습인 속성을 본따서 지었습니다.
그래서 신의 속성이
사람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속성과
아담과 하와의 속성이 그렇게 통했습니다.

그게 최초의 인류이고,
인간의 첫 출발선입니다.

그곳의 어둠은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고요?
그 어둠 속에는 빛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슬프고, 괴롭고,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에도
우리 안에는 ‘신의 속성’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게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둠만 바라보느라
그 안에 이미 깃들어 있는
빛을 보지 않고 있을 따름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눈에 덮힌 비늘을 걷어내고
어둠 속의 빛을
보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요.

그래서 요한 복음서도 말합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요한 복음서 1장5절)

묻고 싶습니다.
인간이 가야할 종착선이 어디일까요.
저는 그게 본래의 출발선이라 봅니다.
어둠을 버리고 빛을 찾는 게 아니라,
어둠 속에 이미 빛이 있음을
깨닫는 일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자꾸
어둠만 보고 있으니까요.
어둠 속의 빛은 보지 않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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