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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독일이 나타났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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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호 20면

독일은 왜 잘하는가

독일은 왜 잘하는가

독일은 왜 잘하는가
존 캠프너 지음
박세연 옮김
열린책들

이건 거의  ‘독일 예찬론’ 수준이다. 자부심과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영국의 언론인이자 국제평론가인 존 캠프너가 쓴 책 제목부터 아예 『독일은 왜 잘하는가(Why The Germans Do It Better)』.

캠프너는 1980년대 중반 서독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89년 베를린장벽 붕괴와 이듬해 독일 통일 격변기에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 특파원으로  동베를린과 라이프치히 등 동독 지역에서 역사의 현장을 지켜봤다. 이후에도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 등 많은 정치인과 경제인, 난민 문제 활동가와 예술인 등 각계각층의 독일인들을 접하면서 무엇이 독일을 지금의 이런 나라로 만든 비결인지를 깊이 탐구했다.

캠프너의 ‘독일 고백’에는 물론 독일의 취약점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도 들어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애정이 잔뜩 묻어 나는 걱정과 공감, 더 잘하기를 바라는 기대감에 더 가까워 보인다. 더군다나 캠프너의 아버지는 히틀러 나치시대 체코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에 살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유대인이다. 독일을 의도적으로 높이 평가할 감정이 전혀 없는 집안 출신이다. ‘느리지만 확실하게(langsam aber sicher)’ 굴러가는 독일 행보에 대한 그의 생생한 경험담을 들어 보자.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이 지난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축제에 초청 받아 도움을 주는 어른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즐기는 모습. 독일은 메르켈 총리 시절 100만 명 넘는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였고,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도덕적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AP=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이 지난달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축제에 초청 받아 도움을 주는 어른들과 함께 놀이기구를 즐기는 모습. 독일은 메르켈 총리 시절 100만 명 넘는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였고, 국제 사회에서 새로운 ‘도덕적 리더’로 자리매김했다. [AP=연합뉴스]

바이마르 인근 부헨발트, 뮌헨 인근 다하우, 베를린 인근 작센하우젠…폴란드의 아우슈비츠처럼 나치시대 독일 내 강제수용소들로, 지금은 유대인학살기념관으로 사용되는 곳들이다. 독일의 현대적 경쟁력은 과거사 기억과 속죄에서 비롯된다. 수도 베를린의 랜드마크인 브란덴부르크문과 라이히스타크(제국의회) 가까운 곳엔 관을 형상화한 2711개의 직사각형 콘크리트 평판으로 이뤄진 조형물이 자리 잡고 있다.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이다. 끔찍했던 과거사를 절대 잊어버리지 않고 가슴 깊이 항상 되새기겠다는 다짐은 독일이 전 세계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는 ‘기초공사’가 돼 줬다.

‘무티(엄마) 리더십’으로 정평이 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전 총리가 재임 16년 동안 몸소 보여 주었던 신뢰와 신중함은 오늘날 독일 사회를 지배하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의 ‘협박’에도 절대 굴하지 않았던 독일은 이제 자유민주주의의 중요한 리더국가라는 대단히 ‘불편한’ 자리를 떠맡게 됐다. 독일 정부는 주요 정책을 승인하기 전에 최대한 많이 살펴본다. 특별위원회들은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안이 나올 때까지 소집된다.

2015년 메르켈의 ‘난민 100만 명 수용’ 결정은 독일과 유럽, 나아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 결정은 독일 내 거센 반발에 부닥쳐 메르켈의 정계 은퇴 일정을 재촉하는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새로운 독일’을 만방에 선포하는 가장 특별한 계기가 됐다. 어느 나라도 관용의 차원에서 독일을 따라잡지 못했다. 영국 신문 미러의 한 칼럼니스트는 “우리는 그런 그들을 조롱했고 우리가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세상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할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고 썼다. 독일이 ‘도덕적 리더’로서 자리매김하는 사건이 된 것이다.

전후 독일을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한 ‘라인강의 기적’은 경제성장률 둔화에도 불구하고 현재진행형이다. ‘정책결정자는 시장이 최대 부(富)를 생산하도록 유도해야 하고 그렇게 생산된 부는 사회 정의라는 이름으로 재분배돼야 한다’고 믿는 이른바 ‘사회적 시장경제’는 건강한 독일 경제를 일군 밑거름이 됐다. 사용자와 노동자가 공동결정하는 독일의 제도에 대해 다른 나라에선 ‘근로자들이 자기 잇속만 차리고 변화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는 우려가 컸지만 독일 기업들의 성공을 측정하는 모든 지표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밖에도 세계적인 기술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사회적 책임 의식이 높은 ‘히든 챔피언’ 중소기업들, 녹색당이 주도하는 환경보호와 에너지전환, 실용적이고 효율성이 높은 교육제도,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문화, 타협할 줄 아는 정치 등 지은이가 열거하는 독일의 경쟁력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다양하다. 그럼에도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더 잘하고 있다는 외부의 주장에 여전히 잘 동의하지 않는다.

캠프너는 “현명한 국가라면 이러한 독일의 감정적 성숙함과 견고함을 결코 외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어두컴컴한 시기에 독일과 비슷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나라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라고도 했다. 친독파도 이런 친독파는 없을 것이다. 성숙하고 부강한 나라의 비밀이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약간은 친독파가 된다고 해도 그렇게 손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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