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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둘 ‘취준생’ 작가…시와 글로 남긴 감동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88호 20면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내 오늘은 밍구스런 야그 보따리를 풀러 왔응이. 서울 아지매, 내 야그 듣고 웃지 마소.”

순분할매는 열일곱에 시집와 ‘스물서이’에 ‘냄편’을 잃었다. ‘아아 둘 데불고’ 품팔고 산나물 뜯어먹으며 살기에 강원도 평창의 겨울은 너무 매섭고 길었다. 옆집 아지매 꼬드김에 눈 딱 감고 씨받이가 돼 아들을 낳았으나 씨 뿌린 남정네는 모른 척 내뺐다. ‘아 셋을 데불고 남의 집 식모 살다’ 막내 학교 갈 나이에 밭에서 쓰러졌다. “옹신도 몬하고 누웠는디, 웬수처럼 지내던 옆집 아지매가 죽을 써 갖고 와설랑은, 지난번 일은 재수가 없을랑 그리됐고(…)” 순분할매는 꽁꽁 접어놨던 장편 소설 같은 삶을 외지인에게 탁 털어놓고 얼마 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갔다.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순분할매의 이야기를 받아 글로 옮긴 ‘서울 아지매’ 이순자 작가의 인생도 장편 소설이다. 그가 작가로 처음 이름을 알린 건 지난해 가을. 매일신문 2021 실버문학상 논픽션부문 수상작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뒤늦게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면서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손에 물 마를 일 없이 살다 남편의 바람 탓에 황혼 이혼을 하고, 62세에 취업전선에 나가 3년간 겪은 빈곤 노인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되 유머러스하게 써내려간 데뷔작이었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란 수상 소감을 남긴 늦깎이 작가는 시상식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두 권의 책은 쉰넷에 문학 공부를 시작해 그가 써둔 시와 수필이다. “국군 훈련복에 총을 메고 있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아버지 사진이/ 혼자 안방 벽을 차지하고 있다”(시 ‘사랑2’).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태어났다. 선천적인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소리를 정확히 듣지 못한다는 걸 시험 빵점 연거푸 맞은 중2에야 알았다. 그는 잘 들리지 않는 귀 대신 온몸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 없이 자라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누구보다 다정했던 막둥이 삼촌, 서른 명 넘는 아이들을 가슴으로 키워낸 큰언니, 가족도 아내도 애인도 아닌데 의리 하나로 의식불명이 된 여자를 돌보는 남자 등 곡절 많은 사연을.

제 몸도 성치 않은데 20년간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했다. 그 자신이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발 벗고 나서서 돕고, 바르게 살기 어려운 걸 알면서도 오지랖을 부렸다는 말에 뭉클해진다. “나는 몸으로 가장 감명 깊은 인생을 살았어.”(시 ‘몽유랩’) 그의 시는 이야기다. 성스러울 만큼 넓고 깊은 사랑이 담긴, 되도록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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