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데믹으로 여행 시작, 다 잘될 테니 계속 걸어가자

중앙선데이

입력 2022.05.14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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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8호 18면

‘행복을 그리는 화가’ 에바 알머슨

화가 에바 알머슨의 신작 ‘함께’는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서 산책 중인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신인섭 기자

화가 에바 알머슨의 신작 ‘함께’는 서울 북촌 한옥마을에서 산책 중인 가족을 그린 작품이다. 신인섭 기자

동그란 얼굴, 낮은 콧대, 귀여운 콧구멍, 짧은 단발 파마머리, 색색의 머리 꽃핀, 미소 짓는 입술. 소소한 일상 속 소중한 시간을 포착해온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이 그리는 여인들의 공통점이다. 가족과 식사를 하거나 춤을 출 때는 물론이고, 혼자 산책을 하거나 눈을 감고 상상을 하는 순간에도 여인들의 눈과 입은 언제나 웃고 있다. 무엇이 그리 좋고 즐거울까. 캔버스 색채들도 밝고 화사해서 그림 앞에 서면 달콤하고 부드러운 딸기 케이크를 선물 받은 느낌이 든다. 덕분에 에바 알머슨에게는 ‘행복을 그리는 화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스페인 출신, 국내 동화책 삽화 작업도  

11일 오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알머슨을 만나자마자 물어본 첫 번째 질문은 ‘이 캐릭터의 창조적 영감의 대상은 누구인가’ 였다. 대부분의 화가들은 그림 속 상징적 캐릭터를 창조할 때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그런데 알머슨의 여성 캐릭터는 서양 여자라기보다 동양인 같다. ‘한국인을 닮았다’ 했더니 그는 웃으며 “전생에 내가 한국과 인연이 깊었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감정과 느낌이 잘 전달되도록 얼굴은 인위적이지 않게, 이목구비를 최소화해서 단순하게 그리려 한다. 처음부터 여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려던 것도 아닌데 일기처럼 그림을 그리다보니 자연스레 이 여성 캐릭터가 주된 화자가 됐다. 그녀는 나일 때도 있고, 때로는 다른 사람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내가 그리는 보편적 일상 속 주인공으로서 누가 보더라도 ‘나를 닮았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탈곡’은 곡식처럼 정말 소중한 것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진 디커뮤니케이션]

‘탈곡’은 곡식처럼 정말 소중한 것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사진 디커뮤니케이션]

알머슨이 3년 만에 한국을 찾은 이유는 5월 13일부터 12월 4일까지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열리는 전시 ‘에바 알머슨, Andando’의 작품 설치를 위해서다. ‘안단도(Andando)’는 스페인어로 ‘계속 걷다’라는 뜻이다. 전시 포스터 속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어디론가 신나게 걸어가는 소녀 그림의 제목이기도 하다. 알머슨은 “안단도는 걸어 온 길에 의심을 품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두 눈으로 바라보는 진취적인 자세에 대한 이야기”라며 “우리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론가 한 걸음을 내딛고 있으며, 손에 들린 여행가방 안에는 지금까지 우리를 이곳으로 이끌어준 모든 장소와 시간의 추억들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현재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는 알머슨은 북유럽을 비롯해 LA·리스본·멜버른 등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영감을 얻고 전시를 여는데 특히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2018년, 2020년 두 번의 큰 전시를 열었고, 그 이전에는 『행복한 그림 이야기』(2012년), 『엄마 얘기 좀 들어보렴』(2014), 『엄마는 해녀입니다』(2017) 등 국내 동화책 삽화를 작업했다. 그의 공식 홈페이지에 가면 서울 북촌 골목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여인이 서 있는 작품 ‘마음은 원하는 곳에 머문다’를 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신작 중에도 북촌을 배경으로 엄마와 아빠, 두 아이가 나란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이 많이 그리웠다. 한국 분들은 내 일을 잘 이해하고 무엇보다 친절하며 마음이 열려 있다. 한식도 그리웠다.(웃음) 한국에 올 때마다 북촌을 간다. 가장 현대적인 것과 오래된 것의 연결고리랄까. 할아버지·할머니와 보낸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나의 미래를 상상하게 된다. 상상도 못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편안함을 느끼는 것, 북촌은 이번 전시 주제 안단도와 너무 잘 맞는 곳이다.”

이번 전시에선 유화, 벽화, 대형 조형물, 드로잉, 조각, 애니메이션 등 총 150여 점이 소개되는데 대다수가 한국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신작들이다. 그런 만큼 알머슨은 “집을 짓는다는 생각”으로 전시장을 11개의 방으로 나누고 편안한 동선을 유도하기 위해 세심하게 신경 썼다. 각각의 방에는 ‘페인팅 라이프’ ‘가족 사전’ ‘사랑’ ‘인생’ ‘축하’ 등의 작은 테마가 붙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방은 도자기로 구운 여성의 두상이 모여 있는 곳이다. ‘나비’ ‘사고의 자유’ ‘고요의 바다’ ‘일탈’ 등의 작품명이 붙은 여성들의 얼굴은 각기 다른 표정으로 저마다의 생각에 잠겨 있다. 알머슨의 캐릭터답게 모두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이 방에는 의외로 ‘연약함과 강인함’이라는 테마가 붙어 있다.

“1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큰 도자기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자기는 인간이 얼마나 다치기 쉽고, 무너지기 쉬운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소재다. 예쁘고 단단해 보이지만 순식간에 박살난다. 우리 정신세계와 같다. 그래서 언제나 균형감을 잘 잡아야 하고, 스스로 ‘괜찮다’ 다독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다지 강하지 않다는 것, 오히려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때론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드는 힘이 된다.”

북촌 그리워 3년 만에 한국 찾아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의 전시 ‘에바 알머슨, Andando’ 포스터.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의 전시 ‘에바 알머슨, Andando’ 포스터.

유화 작품 ‘복서 소녀’도 그런 점에서 코끝이 찡해진다. 눈 한쪽이 파랗게 멍든 채 권투 글로브를 들고 있는 소녀는 씩씩하게 미소 짓고 있다. “복싱하는 이미지들을 여러 장 그렸다. 자신과의 싸움, 내면의 갈등 혹은 타인의 평가로 인해 상처받지 말자는 의미다.”

11개의 테마 공간 중에는 ‘자가격리자들의 초상’도 있다. 코로나로 스페인 전역이 봉쇄된 기간 동안 그린 타인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다. “한 뉴스 채널에서 가족도 없이 고독하게 죽은 코로나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직접 장례식까지 치러주는 간호사의 용기를 보고 영감을 얻은 프로젝트다. 고통스러운 순간에 두려움 없이 손을 내밀어준 간호사의 손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 우리에게는 누군가 필요하다! 그 누군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의 초상을 그리자 결심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친구의 친구들까지 각자의 사진과 짧은 스토리들을 보내줬다. 덕분에 3개월 동안 100여 점의 초상화를 그릴 수 있었다.”

초상화 프로젝트 공간에는 두 손을 맞잡은 드로잉 작품 ‘사랑’도 함께 전시돼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 함께할 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느낀 슬픔과 잔혹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그 사람의 손을 꼭 잡고 함께함으로써 빛나는 따뜻한 감정이 복합적으로 담긴 작품이다. 알머슨은 “이 작품을 그리면서 ‘함께’의 중요성을 다시금 깊게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했다.

팬데믹에서 엔데믹으로 전환된 지금. 어둡고 긴 터널을 뚫고 달려온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은가 물었더니 알머슨은 “안단도!!!”라며 웃었다. “그동안 우리는 상상도 못했던 여러 일을 겪었고, 또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해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실감했고, 당연시 했던 걸 당연시 하면 안 된다는 것도 깨달았다. 우리 인생의 여정은 변곡점을 지나 또 다른 여행을 시작했다. 계속 걸어가자, 그리고 즐길 수 있을 때 즐기자. 토도 이라 비엔(Todo Ira Bien·다 잘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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