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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 둘 '실버 취준생' 작가 이순자가 남긴 시와 글과 감동[BOOK]

중앙일보

입력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꿈이 다시 나를 찾아와 불러줄 때까지 
이순자 지음
휴머니스트

"내 오늘은 밍구스런 야그 보따리를 풀러 왔응이. 서울 아지매, 내 야그 듣고 웃지 마소."

순분할매는 열일곱에 시집와 '스물서이'에 '냄편'을 잃었다. '아아 둘 데불고' 품팔고 산나물 뜯어먹으며 살기에 강원도 평창의 겨울은 너무 매섭고 길었다. 옆집 아지매 꼬드김에 눈 딱 감고 씨받이가 돼 아들을 낳았으나 씨 뿌린 남정네는 모른 척 내뺐다. '아 셋을 데불고 남의 집 식모 살다' 막내 학교 갈 나이에 밭에서 쓰러졌다.

"옹신도 몬하고 누웠는디, 웬수처럼 지내던 옆집 아지매가 죽을 써 갖고 와설랑은, 지난번 일은 재수가 없을랑 그리됐고(…)" 순분할매는 꽁꽁 접어놨던 장편 소설 같은 삶을 외지인에게 탁 털어놓고 얼마 뒤 치매에 걸려 요양원에 갔다.

순분할매의 이야기를 받아 글로 옮긴 '서울 아지매' 이순자 작가의 인생도 장편 소설이다. 그가 작가로 처음 이름을 알린 건 지난해 가을. 매일신문 2021 실버문학상 논픽션부문 수상작 '실버 취준생 분투기'가 뒤늦게 온라인에서 화제가 되면서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손에 물 마를 일 없이 살다 남편의 바람 탓에 황혼 이혼을 하고, 62세에 취업전선에 나가 3년간 겪은 빈곤 노인의 노동 현실을 적나라하되 유머러스하게 써내려간 데뷔작이었다. "정진하리라, 죽는 날까지"란 수상 소감을 남긴 늦깎이 작가는 시상식 한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속엣 얘기를 토해내고 훌훌 떠난 순분할매처럼.

이 두 권의 책은 쉰넷에 문학 공부를 시작해 그가 써둔 시와 수필이다. "국군 훈련복에 총을 메고 있는/ 한 번도 뵌 적 없는 아버지 사진이/ 혼자 안방 벽을 차지하고 있다"(시 '사랑2')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태어났다. 선천적인 감각신경성 난청으로 소리를 정확히 듣지 못한다는 걸 시험 빵점 연거푸 맞은 중2에야 알았다. 그는 잘 들리지 않는 귀 대신 온몸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부모 없이 자라 초등학교도 못 나왔지만 누구보다 다정했던 막둥이 삼촌, 서른 명 넘는 아이들을 가슴으로 키워낸 큰언니, 가족도 아내도 애인도 아닌데 의리 하나로 의식불명이 된 여자를 돌보는 남자 등 곡절 많은 사연을.

제 몸도 성치 않은데 '천사병이 중증'이라 구박받으며 20년간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했다. 그 자신이 너무 많이 아파봤기에 발 벗고 나서서 돕고, 바르게 살기 어려운 걸 알면서도 오지랖을 부렸다는 말에 뭉클해진다. "나는 몸으로 가장 감명 깊은 인생을 살았어."(시 '몽유랩') 그의 시는 이야기다. 성스러울 만큼 넓고 깊은 사랑이 담긴, 되도록 많은 이들이 읽었으면 싶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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