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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경호의 시선

MB 물가의 추억 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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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일이 희망이고 기도였다. 한정된 시간이다. 무실역행(務實力行)하자. 나와 나의 참모들은 얼리버드(early bird)들이었다. 정말이지 쉬지 않고 뛰었고 신나게 일했다.”(이명박 전 대통령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

‘MB 얼리버드’도 구두 닳도록 일했다 #거시대책 없는 물가관리 대책은 한계 #대통령 어퍼컷에 경제가 맞을까 걱정

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옥중에 있긴 하지만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MB)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 회고록에서 “대통령 재임 5년을 10년처럼 일했다”고 표현했다. 회고록 중 ‘물가와의 전쟁’ 부분은 대략 이런 내용이다.

[그래픽] 역대 추경 규모 [그래픽] 역대 추경 규모 (서울=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 윤석열 정부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코로나 완전극복과 민생안정'이라는 주제로 윤 정부 출범 이후 첫 추경안을 의결했다. 올해 들어 두 번째인 이번 추경은 59조4천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0eun@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끝)

[그래픽] 역대 추경 규모 [그래픽] 역대 추경 규모 (서울=연합뉴스) 김영은 기자 = 윤석열 정부는 12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코로나 완전극복과 민생안정'이라는 주제로 윤 정부 출범 이후 첫 추경안을 의결했다. 올해 들어 두 번째인 이번 추경은 59조4천억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0eun@yna.co.kr 트위터 @yonhap_graphics 페이스북 tuney.kr/LeYN1 (끝)

‘외환위기를 또 겪지 않으려면 대외균형(경상수지 개선)을 위해 고환율이 유지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인위적으로 환율을 끌어올리지는 않았다. 국제 금융시장이 경색되면서 이미 저절로 환율은 오르고 있었다. 야당과 진보 쪽에서는 수출 대기업만 좋고 서민들은 고물가에 시달린다며 외환시장 개입을 요구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환율 방어는 하지 않았다. 외환보유액을 소진할 수 없어서다. '
그렇다고 물가 상승을 방치할 수 없었다. 거시 대책 대신 품목별 관리에 주력했다. 서민생활과 밀접한 52개 품목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관리했다(이른바 ‘MB 물가’). 2011년 1월 국무회의에서 “물가상승이 불가피한 부분도 있지만 정부가 노력하면 억제할 수 있다”고 독려했다. 그래도 물가는 올랐다. 그해 7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당시 김대기 경제수석(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통상적인 방법으로 물가를 안정시키기 어렵다. 물가와 전쟁을 한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매주 경제장관들의 물가대책회의가 열렸고 각 부처는 서민 생활과 밀접한 품목의 수급 상황과 가격을 매일 점검했다.’

MB 회고록 얘기를 꺼낸 건, 엊그제 새 정부 대통령실의 첫 수석비서관 회의를 보면서 데자뷔를 느껴서다. 윤석열 대통령의 첫 메시지는 물가였다. 그는 “물가 상승의 원인을 파악하고 억제 대책을 고민해 달라”며 “일을 구두 밑창이 닳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독려했다. MB 시절의 ‘얼리버드’도 구둣바닥이 닳도록 뛰었을 것이다.

물론 대통령이 서민 생활을 힘들게 하는 물가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문제일 수는 없다. 하지만 큰 것(거시 대책)을 놓치면서 작은 것(품목별 미시관리)에만 집중하다 보면, 일은 힘든데 효과는 없고 부작용만 생긴다.
MB의 물가 전쟁은 정권 말인 2012년에야 끝났다. 그조차 이렇게 토로했다. “고유가와 두 차례 세계 경제위기 그리고 자연재해와 구제역 등으로 인한 물가 상승을 정부의 노력만으로 안정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는 임기 중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겼던 문제 중의 하나였다.” 사실상 실패를 인정한 셈이다.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정권 초기의 고환율 정책 탓에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이 늦어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준금리를 올리면 원화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싸져서 달러당 원화 환율을 끌어내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대통령이 물가가 제일 문제라고 강조한 그 날, 당정은 60조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추경에 합의했다.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 등 370만 명에 600만원 이상씩 지원하는 데 23조원의 가장 많은 예산이 투입된다. 시기와 규모를 조정할 수는 없었을까. 당장 6월 지방선거를 위한 ‘선거용 돈 풀기’라는 비판이 나온다.

추경호 경제부총리는 최근 취임사에서 물가 안정 등 민생을 최우선으로 챙기겠다고 했다. 하지만 해외 요인으로 인한 물가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대규모 재정을 쏟아붓는 선택은 아무리 좋게 봐도 엇박자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윤 대통령이 감명 깊게 읽었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에 잘 나와 있듯이,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인 현상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돈이 많이 풀리면 물가는 오르는 법이다.

지난 2월 정부의 물가 대책과 수백 조 원이 들어가는 대선 후보의 공약을 보면서 ‘MB 물가전쟁 시즌 2’가 시작될까 걱정된다는 칼럼(MB 물가의 추억)을 썼다. 걱정이 현실이 되고 있다. 대통령의 1호 공약이 110개 국정과제 중 첫 번째 과제가 되고, 2차 추경으로 구체화하는 걸 보면서 그의 대선 공약을 두려운 마음으로 다시 꺼내 읽었다. 월 100만원의 부모 급여, 노인 기초연금 10만원 단계적 인상, 2025년까지 병장 봉급(자산형성 프로그램 포함) 월 200만원 달성 등이 국정과제에 올랐다. 선거 때 약속은 꼭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결의가 직진 본능을 타고 어디까지 갈까. 권투선수 홍수환에게 배웠다는 대통령의 화려한 어퍼컷에 나라 경제가 정통으로 맞지나 않을까 정말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