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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유리의 이의있는 고발

"1번 찍으면 여자들이 당신 좋아할 것" 이런 갈라치기 부끄럽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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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김은교 기자

그래픽=김은교 기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기획 시리즈 '나는 고발한다. J'Accuse...!'는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새 정부에 바라는 20대의 가감없는 목소리를 전하는 번외편 '이의(이십대 의견)있는 고발'을 일주일 동안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정권에 등을 돌린 20대는 공정에 대한 기대로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후퇴 조짐을 보이는 여러 주요 공약 등으로 벌써부터 이들의 지지가 흔들린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차기 정부에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 속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정확한 사실로 사회적 갈등만 양산한다는 비판 끝에 결국 9일 운영을 접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비판하는 최원영 학생의 글, 국민은 여전히 고통받는데 K방역 자화자찬에만 열을 올렸던 지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김지은씨 글, 월급 200만원 공약으로 이대남의 마음을 움직였던 군대 문제에 대해 쓴 유정민 학생의 글, 대학 인문 계열 출신 취업 준비생의 고통과 이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김창현씨의 글에 이어 오늘(13일) 젠더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권을 비판하는 칼럼이 나갑니다.

20대 남녀가 고루 섞인 이번 '이의있는 고발' 필진은 그동안 '나는 고발한다' 칼럼에 논리적 의견이 담긴 댓글을 달았던 애독자, 그리고 지난달 독자 칼럼 이벤트 응모자 가운데 주제 등을 고려해 선정된 분들입니다. 독자 칼럼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내보낼 예정입니다.

한 어른이 내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바로 이대녀네. 이번 선거에서 이재명 뽑았지?” 2000년생인 나는 한국 나이 스물세 살, 대표적인 Z세대이다. 집에서는 ‘첫째’, 학교에서는 ‘졸업반’, 사회에서는 ‘취준생’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정치권과 언론들은 나와 내 친구들을 ‘이대녀’와 ‘이대남’으로 정의했다.

정치권과 언론,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전체 20대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그런데 단순히 20대의 남성과 여성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대남은 주로 윤석열 후보를 지지한 보수 성향, 이대녀는 주로 이재명 후보를 지지한 진보 성향의 유권자와 연결지어진다.

현실과 동떨어진 온라인 젠더 전쟁

지난 3월 초, 20대 대선을 목전에 둔 어느 날. 카페에서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던 친구(남성)가 얼굴을 찌푸리며 나에게 노트북을 내밀었다. 화면 안에는 ‘여가부 폐지로 이대남에 올인한 윤석열’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종종 자신이 이대남으로 규정되는 것에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여가부 폐지 찬반을 떠나, 여가부를 폐지해서 20대 남성들이 이득을 본다고 생각한다는 언론의 이상한 프레임이 싫다고 했다. 친구는 내게 물었다. “이대남·이대녀라는 말은 누가 만든 거냐? 정작 우리는 우리를 그렇게 안 부르잖아.”

쪽방촌 어르신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하며 만난 또래의 친구(여성)는 나와 함께 음식을 포장하면서 그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자신의 엄마가 젠더 갈등에 관련된 인터넷 뉴스와 댓글 창을 보고 요즘 정말 20대들이 성별로 갈라져서 학교에서 싸우냐고 물어봤다는 것이다. 말하는 친구와 듣는 내가 동시에 웃었다.

지난해 12월의 설문조사 결과

지난해 12월의 설문조사 결과

나를 포함한 현실의 수많은 이대녀·이대남은 우리가 왜 그런 용어로 정의되는지 의문이다. 오직 성별만을 분류 기준으로 삼은 ‘이대○’ 프레임은 개인의 생각과 태도의 차이가 발생하는 다양한 요인들을 무시한다. 대다수 20대는 자기의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발전을 이끌 수 있는 좋은 후보에 투표하려고 한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마치 모든 20대 남성이 여가부 완전 폐지와 여성 징병제를 주장하고, 모든 20대 여성은 여성에 대한 일방적인 배려를 바라는 것처럼 그려진다. 서로의 삶에 대해 이해를 하려는 노력은 찾기가 힘들다. 그저 성별 비하 용어를 사용하며 의견이 다른 서로를 헐뜯는 모습이 펼쳐진다. 온라인 세계의 극단적인 세력들이 이를 부추긴다. ‘나는 페미가 싫어요’ vs ‘나는 한남이 싫어요’. 그 세계에 키보드와 마우스로 대결하는 온라인 젠더전(戰)이 뜨겁다.

언론에서 말하는 이대남·이대녀의 정형화된 이미지가 현실의 20대를 대표할 수는 없다. 평범한 대학생인 내가 직접 보고 겪은 현실 속 이대남·이대녀는 언론과 정치권이 말하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젠더 갈등에 대한 양극단의 생각이 전체 20대 의견으로 대치되는 것이 억울하다. 인터넷의 성별 혐오 표현과 젠더 갈등 양상은 그 사이버 세계에서 유포되고 증폭한다. 현실의 대다수 20대 남녀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슬기롭게 함께 살기를 원한다. 여성은 여성으로 사는 삶의 무게가 있고, 남성도 남성으로 사는 삶의 무게가 있다. 서로 원수(怨讐)가 아니다. 공생(共生)의 관계다. 서로 누가 더 차별받았나를 비교하며 헐뜯어서 해결될 일은 없다.

젠더전(戰)을 이용하는 정치권

정치인들은 극단적인 온라인 젠더전(戰)에 가담하고, 때론 이용당한다. 지난 3월 8일 손혜원 전 의원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2번남을 위한 명상’이라는 2분 12초 분량의 영상을 올렸다. 손 전 의원은 이 영상에서 남성들에게 이재명 후보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이 후보를 남성들이 지지해야 하는 이유가 황당했다. 남성 유권자가 이 후보를 찍으면, 많은 여성이 그 남성 유권자를 좋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윤 후보에 일부 여성들이 반감을 가진 것을 겨냥한 말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은 무조건 여가부 폐지를 반대하고, 여가부 폐지에 찬성하는 남자를 싫어할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발상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게 성별 갈라치기가 아니면 무엇인가? 논란이 되자 손 전 의원은 그 영상을 삭제했다.

손혜원 전 의원이 지난 대선에서 1번 후보를 찍으면 여성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만든 동영상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손혜원 전 의원이 지난 대선에서 1번 후보를 찍으면 여성들이 좋아할 것이라는 내용으로 만든 동영상의 한 장면. [유튜브 캡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도 ‘성별 편 가르기’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이 대표는 지난 2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 언론의 성 평등 관련 공약 질의에 윤석열 후보만 답변을 거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진을 아무런 설명 없이 게시했다. 성 평등 질의에 답변 자체를 거부한 것을 보란 듯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은 특정 집단의 표심을 사기 위한 제스처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정치권에선 이해와 포용을 구하는 것보다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표를 얻는 데 유리하다는 셈법이 작동한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 모두 이대남과 이대녀에게 이런 유치한 구애 작전을 펼쳤다.

대선은 두 달 전에 끝났지만 이대남·이대녀 담론은 현재진행형이다. 1번남, 2번남 등의 성별 갈라치기 신조어와 20대 남녀 중 한쪽의 지지를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려는 모습이 지방선거와 재·보궐 선거를 앞둔 지금 다시 고개를 든다. 그 과정에서 20대 남성들이 주장하는 구체적인 현실의 불공정 문제, 20대 여성들이 말하는 차별의 문제는 그저 상대를 공격하는 정치적 구호 취급을 받는다.

그만 보고 싶은 성별 타깃팅 공약

지난 2월 26일 서울 종로구 우리소극장에서 열린 '2022 대선대응 청년행동'의 집회에서 청년들이 대선후보들에게 갈라치기 중단을 요구하는 손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지난 2월 26일 서울 종로구 우리소극장에서 열린 '2022 대선대응 청년행동'의 집회에서 청년들이 대선후보들에게 갈라치기 중단을 요구하는 손피켓을 들어 보이고 있다. [뉴스1]

역대 최악의 취업난과 부동산 대란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나와 같은 20대 청춘들이 정쟁의 수단이 된 것이 안타깝다. 인터넷의 극단적인 담화 세력의 의견들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성별을 대상으로 한 이대남·이대녀 맞춤 공약. 이런 것 좀 안 보고 싶다. 국민을 위한 정책에 성별 타깃팅이 웬 말인가. 그냥 서로 싸우자는 말밖에 더 되나. 그냥 모든 20대를 위한, 청년층을 위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길 바란다.

5년 뒤 윤석열 정부 다음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는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표현이 더는 쓰이지 않기를 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윤석열 정부가 할 일이 있다. 여성과 남성의 관계 사이에 무지와 혐오를 채워 넣는 인터넷 댓글과 극단적인 여론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성별 갈라치기 유혹에 의연한 새 정부의 성숙한 모습을 보고 싶다. 현실의 이대녀·이대남과 온라인의 이대녀·이대남을 위해. 그리고 MZ세대 다음의 세대를 위해서도.

정유리 동덕여대 영어과 4학년

정유리 동덕여대 영어과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