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다시 본 5년전 文취임사, 실소 터진 이 부분…尹은 다를까 [주본새](33)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차이나랩

차이나랩’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대통령 취임사를 유튜브로 봤다. '핏-', 웃음이 새어 나왔다. 지키지도 못할 말을 왜 그리 당당하게 외쳤을까. '저건 완연한 빈말이네...'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긍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는 실망이었다.

꼭 5년 전,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사가 그랬다. 독자 여러분도 한 번 보시라.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실소를 터트린 건 이 대목에서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았던 분들도 한 분 한 분 섬기겠습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된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그랬던가? 지난 5년 국민 갈라치기가 횡행했고, 회전문을 태워서라도 내 사람만 챙기지 않았던가? 내로남불 비난 속에서도 진영의 논리만 앞세우지 않았나? 답답하다.

통합은 여전히 최고의 시대 정신이다. 문재인 때 안 됐으니 윤석열도, 이재명도 하나같이 외친다. 근데, 안 된다. 선거 끝나자마자 그들은 여지없이 또 싸운다. 오히려 더 심하다. 거의 광기(狂氣) 수준이다. 공격과 방어의 입장만 바뀌었을 뿐이다.

통합이라는 게 애당초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왼쪽)와 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전 대통령 부부(왼쪽)와 박근혜 전 대통령이 10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해 자리에 앉아 있다. /연합뉴스

오늘 통합을 얘기해보자. 주역 38번째 '화택규(火澤睽)' 괘를 뽑았다. 불(離, ☲)이 위에, 연못(兌, ☱)이 아래 놓여있는 형상이다.

불은 위로 올라가고, 연못의 물은 아래로 내려가는 속성을 갖는다. 서로 흩어질 뿐 만나지 않는다. 그래서 괘 이름이 '사시(斜視, 사팔눈)'를 뜻하는 '睽(규)'다. 왼쪽, 오른쪽 눈이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니 하나 될 리 없다. 통합이 안 된다. '화택규'가 흔히 '모순의 괘'로 통하는 이유다.

한집에 사는 두 여인으로도 비유된다. 둘은 옥신각신 서로 뜻이 맞지 않아 함께하기 힘들다(二女同居, 其志不同行). 언니, 동생은 조금이라도 더 많이 먹으려고 눈치싸움을 벌인다. 한 남자를 섬기는 정실과 첩이라면 '암투'는 더 심할 터다. 밤낮 티격태격 싸운다.

한 나라 좁은 땅덩이에 살면서도 보수와 진보가 갈리고, 젊은 여성과 남성이 반목(反目)한다. 세대 간 생각이 다르고, 지역 간 갈등도 여전하다. 지금 우리 사회 상황이 바로 '睽(규)'다.

주역 38번째 '화택규(火澤?)' 괘는 불(離)이 위에, 연못(兌)이 아래 놓여있는 형상이다. /바이두

주역 38번째 '화택규(火澤?)' 괘는 불(離)이 위에, 연못(兌)이 아래 놓여있는 형상이다. /바이두

갈등과 분열, 시기와 질투…. 좋을 리 없다. 그런데 괘사(卦辭)는 다른 말을 한다.

'小事吉'
'작은 일에는 길하다'.

딱 한 마디다. 뭔 뜻여? 그럼 큰일(大事)에는 나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소사(小事)와 대사(大事)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고문 연구에 조예가 깊은 대만사범대학 정스창(曾仕强)교수는 "소사란 내부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요, 대사는 외부의 힘이 개입할 정도로 커진 일"이라고 해석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小事(작은 일)=조화와 타협으로 내부 해결이 가능한 일

大事(큰일)=외부 힘이 개입되는 일

정 교수는 '괘사 해석도 달라야 한다'고 말한다. '小事吉(소사길)'의 뜻은 '내부적으로 타협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면 길하다'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거꾸로 내부 파열음이 외부에 알려지게 되면 일은 커진다. 흉(凶)하다. 그게 대사(大事)다.

정치권은 지금 화력을 온통 내부 싸움질에 쏟아붓고 있다. 밖에는 신경 쓸 틈도 없다. 북한 미사일 시험, 미국의 '빅스텝' 금리 인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내부에서 아옹다옹 싸우다 외부에서 큰일 당하지 않으리라 누가 보장하겠는가.

주역은 다툼과 반목, 갈등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규(睽)'의 상태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도 않는다.

불과 물은 만나지 않는다. 서로 상극이다. 그러나 둘은 분명 자연에 존재한다. 다만 '규(睽)'의 상태로 어울릴 뿐이다. 그게 나쁜 것인가? 아니다. 궁즉통(窮則通), 상극인 존재도 서로 통하는 게 자연의 이치이자 인간 세계의 도리다.

'규(睽)'괘의 단사(彖辭, 괘사를 설명해주는 말)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天地睽而其事同也.
하늘과 땅은 나뉘어 다르지만, 함께(同) 만물을 생장(生長)시키고

男女睽而其志通也.
남자와 여자는 나뉘어 다르지만, 그 뜻이 서로 통해 합하고

萬物睽而其事類也
만물은 나뉘어 다르므로 다양한 종류를 형성한다.

달라 나뉘어 있기에 하나를 만들 수 있고, 뜻이 통하고, 다양성을 낳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조화, 곧 어우러짐이다. '소사길(小事吉)'은 이 웅대한 메커니즘을 짧은 언어로 함축하고 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 우리 사회도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잡으며 서로 견제하고 협력해야 조화롭게 발전한다. 건강한 청춘 남녀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지키고 있어야 사회에 활기가 돋는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야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나온다. 획일화된 사회로는 발전할 수 없다.

서로 다름을 걱정하지 말라. 중요한 것은 오로지 조화와 타협뿐이다. '다름'을 긍정의 에너지로 승화시켜라! 그게 바로 '화택규' 괘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다.

공자(孔子)는 '화합하되 획일적이 되지 말라'고 했다. 맹목적으로 하나가 되려 할 뿐 화합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바이두

공자(孔子)는 '화합하되 획일적이 되지 말라'고 했다. 맹목적으로 하나가 되려 할 뿐 화합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바이두

공자(孔子)는 이를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고 표현했다. '화합하되 획일적이 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맹목적으로 하나가 되려 할 뿐 화합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건 소인(모리배)들이나 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

사사건건 싸움질만 해대는 여당과 야당. 그들의 의견이 다름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름을 긍정의 에너지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정치 행태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같은 진영끼리 뭉쳐 똬리를 틀고, 상대방을 적대시한다. 그러기에 우리 정계는 소인 모리배들이 판치는 '同而不和(동이불화)' 세상이 된다.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규(睽)' 괘 첫 효사(爻辭)에는 다소 엉뚱한 비유가 나온다.

喪馬勿逐自復, 見惡人無咎

잃어버린 말을 쫓지 말라, 스스로 돌아온다. 악인을 만나도 허물이 없다.

'잃어버린 말'은 말은 무엇이며, '악인'은 또 누구인가…. 어렵다. 다시 정쓰창 교수의 해석을 들어보자.

정 교수는 '느긋한 포용심'을 강조한다. '말을 잃었다'는 것은 곧 무엇인가 소중한 물건을 잃었다는 뜻이다. 조급할 수밖에 없다. 득달같이 달려가 찾아와야 정상이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돌아오게 되어 있다.

갈등을 대하는 군자의 태도가 그러해야 한다. 지금은 상대편과 생각이 다르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럴수록 '사필귀정, 해결되겠지….'라는 느긋함으로 기다려야 한다. 사사건건 달려들어 싸움을 거는 건 소인배나 하는 짓이다.

'악인(惡人)'은 나와 의견이 달라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이다. 그래도 자주 만나고, 대화해야 허물이 없다. 다른 진영 인사라도 입장을 바꿔 생각하고, 즐겨 만나 얘기해야 한다. 그래야 조화와 타협이 살아나고, '다름'을 긍정의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있다.

주역은 '뒷 길목(巷)에서라도 만나라'고 했다. 막후 협상으로라도 대화와 타협을 끌어내야 한다는 얘기다. '신뢰로 교류해야 허물이 없다(交孚無咎)'라고도 했다. 신뢰야말로 대화와 타협의 기본인 까닭이다.

대화가 사라지면 진영 논리는 더 강해진다(睽孤). 우리 편끼리만 뭉친다. 상대 진영에서 혹 우리를 위해 하려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악인'에게는 떼거리로 달려들어 문자 폭탄이라도 날려야 마음이 놓인다. 그러니 싸움은 그치지 않는다.

의심하지 말아라. 상대 역시 함께 나라를 만들고, 함께 기업을 키우고, 함께 가정을 만들어가야 할 파트너 아니던가. 마지막 괘사는 이렇게 말한다.

見豕負塗, 載鬼一車, 先張之弧, 後說之弧, 匪寇婚媾

등에 진흙을 뒤집어쓴 돼지, 수레에 가득 실린 귀신을 보고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그러나 쏘지 않고 곧 풀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도둑이 아니라 결혼 행렬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환각 상태다. 결혼 행렬을 귀신의 무리로 잘 못 보고 있다. 그러니 조금만 거슬려도 활을 챙겨 시위를 당긴다. 저들이 나를 해칠 것으로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환각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괘 대상(大象, 전체 상징이 주는 의미)은 이렇게 말한다.

上火下澤睽, 君子以同而異

불과 물이 위아래로 있는 게 睽(규)괘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로써 같으면서도 다른 이치를 생각한다.

주역은 다툼과 갈등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규'의 상태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도 않는다./ 바이두

주역은 다툼과 갈등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규'의 상태를 '나쁜 것'이라 규정하지도 않는다./ 바이두

'같음'과 '다름'의 이치? 뭘 말하는 걸까.

'같음'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끼리끼리 뭉치는 '일동(一同)'이 아닌 구성원 모두가 함께하는 '대동(大同)'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다름(異)'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다름'은 '소사길(小事吉)'의 메커니즘을 통해 긍정의 에너지로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그대로 이어진다. 사마천이 설명하는 '같음'과 '다름'은 이렇다.

樂者爲同, 禮者爲異
同則相親, 異則相敬

'같음'의 속성은 즐거움이요, '다름'의 속성은 예의다.

같으면 서로 친해지고, 다르면 상대를 존중해야 한다.

'같음'의 속성은 친함이다. 당연하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끼리는 잘 어울린다. 만나면 즐거우니까 말이다. '다름'의 속성은 공경이다.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존중하고, 예의를 다해 대해야 한다. 다르다고 무시하고, 배척하지 말라는 얘기다.

문제는 항상 지나치다는 데 있다.

樂勝則流, 禮勝則離

즐거움(같음)이 지나치면 끼리끼리 몰려다니고, 예의(다름)가 지나치면 도덕에서 멀어진다.

너무 '같음'만 강조하면 유파(流派)가 형성된다. 진영이 굳어진다. 그러니 끼리끼리 몰려다니고, 이권의 똬리를 튼다. 우리 정치권의 상황이 그렇다.

그렇다고 '다름'만 강조하면 밤낮없이 상대를 비난하고, 또 싸운다.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쌍욕을 담아 문자 폭탄을 날린다. '예의 도덕은 개나 줘~', 민의의 전당이라는 국회에서 몸싸움이 난무한다.

그러니 통합은 언제나 다음, 다음으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를 유튜브로 본다. 통합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다. 엇? 통합이 없어? 취임 이튿날 출근길 기자 앞에 선 윤 대통령은 '너무 당연한 거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았다'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을 했다. 통합은 그만큼 우리 정치의 최고 화두로 남았다.

5년 후 대통령이 바뀔 때 또다시 같은 질문이 나올 것이다.

과연 우리는 통합을 이뤄냈는가?

우리는 답을 준비해야 한다. 핵심은 한마디다.

異則相敬
다를수록 존중하고, 예의를 다해야 한다.

통합이라는 게 원래부터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한우덕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