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제안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농구와 관련된 걸 하고 싶었습니다. 감독 자리는 후배들한테 물려주고 (구단 최고 책임자를) 맡게 됐죠. 종합적으로 고민했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한 게 농구인데, 아무래도 농구판에 있는 게 낫지 않겠나’ 그런 생각에 결정했습니다.”
4년 만에 코트에 컴백하는 허재(57)가 11일 중앙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밝힌 속내다.
자산운용사 데이원자산운용은 11일 “남자프로농구 고양 오리온과 양수도 계약을 하루 전 체결했다. 연고지는 고양시로 유지하며, 기존 선수단도 승계한다”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농구 레전드 허재를 최고 책임자로 내정해 차별화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데이원자산운용은 한국테크놀로지와 대우조선해양건설의 관계사다. 금융회사가 남자프로농구단을 운영하는 건 원주 DB에 이어 두 번째다.
허재가 맡은 ‘최고 책임자’는 단장급 임원이다. 이로써 선수→감독→예능인→행정가까지 ‘4단 변신’이 완료됐다.
허재는 현역 시절 ‘농구 대통령’이라 불리며 큰 인기를 누렸다. ‘농구는 허재 하기 나름’이란 말까지 나왔다. 기아 선수였던 1997~98시즌 챔피언결정전 도중 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도 투혼을 발휘해 최우수선수(MVP)를 받았다. 태극마크를 달고 1990년 세계선수권대회 이집트전에서 홀로 54점을 몰아쳐 승리를 이끈 이력도 있다.
은퇴 후 감독으로 변신한 허재는 2005년 전주 KCC 지휘봉을 잡고 2차례 챔프전 우승을 이끌었다. 2013년 심판 판정에 불같이 항의하며 “이게 블록이야”라고 수차례 소리쳐 화제의 중심에 섰다. 팬들은 ‘블록’이 ‘불낙’처럼 들린다며 ‘불낙전골’ 광고와 합성한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허재는 농구대표팀을 이끌고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3위를 기록한 뒤 농구계를 떠났다.
이듬해엔 예능인으로 깜짝 변신했다. 2019년 6월 JTBC ‘뭉쳐야 찬다’에 출연한 뒤 ‘예능 대통령’으로 거듭났다. 골키퍼로 출전해 자기편 선수의 백 패스를 손으로 잡는 ‘허당미’를 선보이며 인기를 끌었다. “그거슨(그것은) 아니지”라는 유행어를 만들었고 피자 광고도 찍었다. 지난해엔 KBS 연예대상 최우수상 주인공이 됐다. 선수와 지도자 시절엔 ‘버럭’하는 이미지가 강해 대중에 쉽게 다가서지 못했지만, 예능에 몸담은 이후 꾸밈 없이 편안한 이미지로 사랑 받았다.
‘예능 블루칩’으로 인기가 여전했지만, 허재는 고심 끝에 ‘농구계 복귀’로 가닥을 잡았다. 데이원자산운용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하며 삼고초려에 나선 결과이기도 했다.
허재 측근은 “정확한 속마음까진 알 수 없지만, ‘나는 농구인이니까, 그래서 한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측근은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허재가 ‘언제까지 연예인 할 생각인가. 농구인으로 남고 싶다면 그래선 안 된다’는 조언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귀띔했다.
예능인으로 큰 인기를 누리던 중에도 허재는 사석에서 “난 뼛속까지 농구인이다. 언젠간 농구계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농구 부활을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의미를 담아 유튜브 채널 ‘모든 허재’를 개설했고, 올스타전에서 심판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농구인으로 돌아간 허재는 향후 예능과 선을 긋는 걸까. 데이원자산운용 관계자는 “TV 출연 여부 등 (업무 관련) 세부 사항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사자는 “농구와 관련한 좋은 프로그램이 있다면 (출연할 수 있다). 상황 봐서”라고 말을 아꼈다. 허재는 농구계 복귀 소식이 전해진 날도 두 아들 허웅(29·원주 DB), 허훈(27·수원 KT)과 섬에서 예능 촬영 중이었다. 허재 측근은 “예능 출연을 1~2개로 최소화하고 우선 농구단에 집중하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귀띔했다.
데이원자산운용의 새 사령탑으로는 김승기(50) 안양 KGC 인삼공사 감독이 거론된다. 김 감독은 지난 시즌 챔프전 우승, 올 시즌 챔프전 준우승을 이끌어 지도력을 인정 받았다. 중앙대 후배로 최근 허재의 모친상을 끝까지 지킬 만큼 각별한 사이다. 다만 현 소속팀 KGC도 1+1 옵션 계약이 끝나는 김승기 감독을 붙잡길 원하는 게 변수다.
차남 허훈은 15일에 상무로 군 입대한다. 3년 연속 인기상을 받은 장남 DB 가드 허웅은 이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취득했다. 허웅이 데이원자산운용에 합류할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허재는 KCC 감독이던 2014년 신인 드래프트 때 허웅을 뽑을 기회가 있었지만 김지후를 선택한 바 있다. 당시 아내에게 이혼 당할 뻔했다.
허재는 ‘부자가 한 팀에 몸담으면 서로 힘들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다만 데이원자산운용이 의지를 갖고 베팅할 경우 ‘허씨 부자’가 한솥밥을 먹는 장면을 볼 가능성도 있다.
‘허허허허’ 허재의 4단 변신
① 선수 땐 ‘농구 대통령’ : 용산고-중앙대-기아-동부(2004년 은퇴), MVP 4회
② 감독 땐 ‘버럭 허재’ : KCC(2005~2015) 챔프전 2회 우승, 대표팀(2009, 2011, 2016~18)
③ 예능인 땐 ‘예능 대통령’: JTBC 뭉쳐야 찬다 등(2019~), KBS 연예대상 최우수상(2021)
④ 행정가로는 ‘?’: 데이원자산운용 최고책임자(사실상 단장,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