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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창현의 이의있는 고발

공무원 늘리기론 해결 못한다…'문송합니다' 해법 왜 외면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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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전유진 기자

그래픽= 전유진 기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기획 시리즈 '나는 고발한다. J'Accuse...!'는 윤석열 정부 출범에 맞춰 새 정부에 바라는 20대의 가감없는 목소리를 전하는 번외편 '이의(이십대 의견)있는 고발'을 일주일 동안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정권에 등을 돌린 20대는 공정에 대한 기대로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후퇴 조짐을 보이는 여러 주요 공약 등으로 벌써부터 이들의 지지가 흔들린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차기 정부에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 속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정확한 사실로 사회적 갈등만 양산한다는 비판 끝에 결국 9일 운영을 접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비판하는 최원영 학생의 글, 국민은 여전히 고통받는데 K방역 자화자찬에만 열을 올렸던 지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김지은씨 글, 월급 200만원 공약으로 이대남의 마음을 움직였던 군대 문제에 대해 쓴 유정민 학생의 글에 이어 오늘(12일)은 대학 인문 계열 출신 취업 준비생의 고통과 이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는 김창현씨의 칼럼이 나갑니다. 내일은 20대 젠더 갈등에 대한 글이 게재됩니다.

20대 남녀가 고루 섞인 이번 '이의있는 고발' 필진은 그동안 '나는 고발한다' 칼럼에 논리적 의견이 담긴 댓글을 달았던 애독자, 그리고 지난달 독자 칼럼 이벤트 응모자 가운데 주제 등을 고려해 선정된 분들입니다. 독자 칼럼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내보낼 예정입니다.

고교 2학년 국어 수업에서 채만식의 소설 '레디메이드 인생'을 접했다. 대학을 나왔지만 번듯한 직장은커녕 밥벌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주인공 P가 자기 아들을 학교가 아닌 공장에 보낸다는 내용이다. 공장장은 못 배운 자신도 뼈 빠지게 일해서 자식을 학교에 보내려한다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P는 요지부동이다. 대학을 나와도 사회에서 쓰임이 없는데 그럴 바엔 기술을 배우는 게 낫다고 한다.

학교에서 배운 청산별곡, 위법성 조각사유, 삼각함수는 지금 기억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하지만 '레디메이드 인생' 만큼은 뇌리에 또렷이 박혀 있다. 내 인생이 P와 크게 다르지 않게 흘러갈 것이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인 걸까. 고등학교 때 문과를, 대학에선 국어국문학과 정치외교학을 복수로 전공하고 졸업 후 반년째 취업 준비 중인 나는 몇 달 전 고교 입시 문제로 고민 중인 사촌 동생에게 인문계고가 아닌 미용고등학교를 추천했다. 공부에 크게 흥미를 보이지 않는 사촌 동생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비하는 게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10년째 지속되는 "문송합니다" 

100년 전 문과를 택해 취업하지 못했던 P와 지금 사회를 정처 없이 떠도는 문과생들. 정도는 다를 수 있겠지만, 맥락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신조어의 평균 수명은 대개 짧으면 몇 달, 길어도 1년이다. 그런데 문송합니다(문과라 죄송합니다), 인구론(인문계 90%가 논다) 같은 단어는 10년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올해 통계청에서 발표한 ‘전공계열별 경제활동인구 자료’에 따르면 2019년 대비 2020년 취업자 수가 줄어든 전공은 전부 문과 계열이었다. 문과 출신이 취업하기 어려운 것이 특별한 현상은 아니다. 문제는 문과 취업난이 사회적 골칫거리인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누구도 손대려는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그렇게 골칫거리는 방 안의 코끼리처럼 꽤 오랜 시간 우리 사회에 방치돼 있다.

문과 취업 문제를 제기하면 곧바로 나오는 말이 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이과를 택했어야지." 자업자득이라고 한다.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는 된다. 우리 사회는 개인 자유를 폭넓게 보장하기에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엄연히 중등 교육과정과 고등 교육과정에 문과가 존재하는데 졸업 후 취업이 안 되는 문제와 그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는 게 당연한 것일까.

고교생이 문과의 미래 알기가 쉽나 

묻고 싶다. 과연 중·고교 때 인생 마스터플랜을 짜는 사람은 몇이나 되느냐고. 한국에서 대학 입시전쟁을 치른 사람은 누구나 알 거다. 한국 입시는 학생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유치원 때는 조기 영어교육을, 초등학교 때는 중학교 혹은 고등학교 수학까지 선행학습을 시키고, 본격적으로 입시 전선에 뛰어들면 아침 7시에 학교에 가 자정쯤 학원에서 돌아온다. 수면 시간은 6시간도 채 되지 않고, 교양서적은커녕 교과서·문제집 읽고 풀기에 바쁘다. 경주마같이 눈가리개를 씌우고 명문대 또는 인서울 골인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현실에서 대학 이후 삶을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선생님들이 상담사 역할을 해줘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다지 가능하지가 않다. 일선 고교 선생님들을 보면 수업과 행정 업무 외의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학생 진로 상담은 보통 학기 초와 말에 도합 두 번 정도 진행하고, 상담 내용은 학생 진로나 미래가 아닌 내신과 수능 성적 중심이다.

대학 인문계 정원에 과감한 칼질 필요

혹자는 문과 공부가 공부냐고, 문과가 잘 때 이과는 열심히 노력해서 취업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한다. 그런데 두 학문의 쉽고 어려움을 동일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 있나. 문과라고 공부를 덜 한다고, 이과라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한다고 단정하는 게 가능한가. 외국어 두세 개를 구사하고, 토익 950점은 기본이고 토플 점수 110점 보유한 사람 주변에 꽤 있다. 각종 공모전, 인턴, 알바까지 하느라 밤잠을 줄이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문과라고 고등학교 3년, 대학 4년 도합 7년을 술 마시고, 풍월 읊다가 갑자기 취업이 어렵다고 신세 한탄하는 건 아니다.

2019년 청와대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 주재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가 열렸다. 엄창환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가 청년들의 취업난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흘렸다. [연합뉴스]

2019년 청와대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 주재로 시민사회단체 간담회가 열렸다. 엄창환 전국청년정책네트워크 대표가 청년들의 취업난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을 흘렸다. [연합뉴스]

해답은 있다. 대학에서 문과 정원을 줄여야 한다. 우선 어문·역사·철학에 혹독할 정도로 메스를 대야 한다. 소위 문·사·철을 전공한 박사학위 소지자 중 37%가량이 한 해 2000만원의 수입도 얻지 못한다. 논술학원·국어학원 같이 단기 알바를 전전하느라 전공 분야를 연구할 시간은 사실상 없다. 대졸자도 4년간 3000만원에 달하는 등록금을 내고 졸업 후 취업을 위해 사교육 업체에 또 돈을 낸다.

공무원 일자리 늘리기, 언 발에 오줌 누기 

문재인 정부는 지난 5년간 공무원과 공공기관 일자리를 늘려 청년실업 문제를 덜려고 했다. 기업에 문과 졸업생을 데려갈 여력이 있지 않고, 인생 첫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을 외면하면 몇 년 뒤 더 큰 부채로 돌아올 수 있으니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정부가 이들을 껴안는 것에는 나름의 합리성이 있었다. 하지만 국가 재정이 화수분이 아닌데 매년 사회에 나오는 수십만 명의 문과 졸업생을 공공부문 일자리로 해결할 수는 없다. 언 발에 오줌 누기와 다를 게 없다.

일본은 2015년부터 정부가 “대학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전략적으로 집중 육성해야 한다”며 전국 국립대학 문과 계열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행했다. 다수 국립대는 문과 학부생 모집 규모를 큰 폭으로 줄였다. 우리도 박근혜 정부 당시 사회 수요에 맞게 인문계를 줄이고 이공계를 늘리는 내용을 담은 프라임 사업을 진행했다. 일부 대학에선 스스로 문과 계열 학과들을 통폐합하고 있지만, 2021년 4년제 일반대 졸업자 중 이공계보다 문과 비중이 높은 것을 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4차 산업혁명은 미래가 아닌 우리 삶에 닥친 현실이고, 코로나 19는 이를 심화했다. 슬기로운 산업 전환을 위해 지난 5년간 문과 구조조정에 관한 최소한 밑그림이라도 그려야 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500쪽에 달하는 ‘문재인 정부 4년 100대 국정과제 실적’ 자료집에서 ‘인문계’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곳은 ‘상대적으로 취업이 어려운 인문계를 졸업한 청년들의 해외취업 기회가 확대됐다’는 문장 한 줄이 전부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 정부의 실책을 본보기로 삼아 근원적 문제 해결에 나서길 바란다. 청년들의 고통은 국가적 비극이기도 하다.

  김창현 취업 준비생

김창현 취업 준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