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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성 파티 끝, 신흥국 통화가치 뚝…94년 '데킬라 위기' 재연?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달러가치가 2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을 때 신흥국 통화가치는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다. 사진은 뉴스1

달러가치가 2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치솟을 때 신흥국 통화가치는 눈에 띄게 하락하고 있다. 사진은 뉴스1

파티는 끝났다. 넘치는 유동성이 말라가며 신흥국 통화가 자유 낙하 중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예상보다 빠르게 돈줄을 죄면서, 미 달러의 몸값은 2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솟구쳤다. '긴축 발작' 속 달러 부채가 많은 신흥국이 '데킬라 위기(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달러 강세 속 신흥국 통화는 맥을 못 추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신흥국 통화 25개로 구성된 MSCI 신흥국 통화지수는 10일(현지시간) 1672.62로 나타났다. 4월 초(4일 종가 1746.64)와 비교하면 한 달 사이 4.2% 하락했다.

홀로 날아오르는 ‘수퍼 달러(달러 강세)’와 비교된다. 10일(현지시간) 유로와 일본 엔 등 주요 여섯 개 통화에 대한 달러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1973년=100)는 같은 기간 5% 오른 103.94를 기록했다. 2002년 12월 13일(103.98) 이후 19년 5개월 만에 최고치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신흥국 통화가치를 끌어내리는 불쏘시개는 Fed의 공격적인 통화 긴축 행보다. Fed는 지난 4일 빅스텝(0.5%포인트 금리 인상)을 밟은 데 이어 올해 두세 차례 추가 빅스텝(점보 스텝)을 예고했다.

미국이 오는 6·7월 연이어 빅스텝을 밟고, 남은 회의(9·11·12월) 때마다 금리를 0.25%포인트 올린다면 연말 금리 상단은 연 2.75%에 이른다. 연초 제로(연 0~0.25%) 수준이었던 미국 기준금리가 1년 만에 연 3%(상단기준) 선에 바짝 다가서는 것이다.

미국 금리가 치솟으면 기초 체력이 약한 신흥국은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저금리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은 신흥국으로 향했던 글로벌 자금의 이탈이 본격화해서다. 특히 달러 빚이 많은 신흥 시장은 달러 대비 통화가치가 급락(환율 상승)하며 빚 부담은 더 커질 수 있다.

장기화하는 중국의 코로나 봉쇄도 신흥국 경제에는 악재다. 세계의 공장이자 수출 시장인 중국이 멈춰 서면 공급망 병목 현상이 커지면서 수입 물품의 가격 등이 오를 수 있고, 신흥국의 대중 수출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빨라지는 미국의 긴축에 대응하기 위해 신흥국도 앞다퉈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불붙은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잡고,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한 최후의 보루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지난 4일 브라질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2.75%로 단숨에 1%포인트 인상했다. 지난해 3월(연 2.75%) 0.75%포인트 금리를 올린 이후 10차례 연속 인상이다.

인도도 이날 기준금리인 정책 레포금리를 4%에서 4.4%로 0.4%포인트 올렸다. 2018년 8월 이후 첫인상이다. 아르헨티나는 지난달 기준금리(47%)를 2.5%포인트나 올렸다. 올해 들어 4번째 인상에 나선 것이다.

기준금리를 가파르게 올리며 방어선을 쌓고 있지만, 일부 신흥국의 통화가치는 역대 최저 수준으로 폭락했다.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인도 루피화는 지난 9일(현지시간) 처음으로 달러당 77루피 선을 뚫고 77.350루피까지 내려앉았다. 역대 최저 수준이다.

아르헨티나 페소 가치는 10일(현지시간) 달러당 116.93페소를 기록하며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인 2020년 초(달러당 59.87페소)보다 2배 가까이 하락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원화가치도 강달러 흐름 속 속절없이 하락하고 있다. 11일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화값은 전날보다 1.1원 오른 달러당 1275.3원에 마감했다. 하지만 장중에는 2020년 3월 이후 최저치인 1280.2원까지 급락했다.

상당수 전문가는 신흥국이 연쇄적으로 흔들리던 지난 94년 멕시코의 ‘데킬라 위기’가 재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당시 도화선도 미국의 가파른 금리 인상이었다. Fed는 1994년 2월부터 1년 만에 6차례에 걸쳐 금리를 연 3%에서 6%로 배로 끌어올렸다.

달러 강세에 따른 자금 이탈은 멕시코의 금융위기로 번졌고, 아르헨티나와 태국, 필리핀을 거쳐 한국까지 연쇄적으로 위험에 빠뜨렸다. 당시 이런 현상을 두고 ‘멕시코의 전통술 데킬라에 취한 거 같다’고 해 '데킬라 효과'로 불렀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미국의 고강도 통화 긴축정책에 달러가치가 더 뛰면 달러 빚이 많은 신흥국 중심으로 타격이 커질 수 있다”며 “현재 신흥국 위기의 시발점이 됐던 1994년 멕시코 금융위기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내년 미국을 중심으로 전 세계가 경기 침체에 빠질 수 있다”며 “그 가운데 기초 체력이 약한 신흥국은 높은 인플레이션과 자본 유출로 위기에 놓일 수 있다”고 전망했다.

다만 현재의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세를 위기로 단정하긴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우크라이나 사태 등 각종 악재가 현재 달러 가격을 과도하게 밀어 올렸다”며 “(달러가치가) 초강세 과정에 심리적 쏠림이 상당 부분 기여한 만큼 되돌림 현상이 나타나면 신흥국 통화가치 하락도 진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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