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의 CAR&] 오늘 사는 車가 가장 싸다…엎친데 덮친격 카플레이션 비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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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내 한 명품매장 앞에서 ‘오픈런’을 위해 소비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자동차 시장에서도 차량 가격의 상승으로 저렴한 차량 구입이 어려워지고 있다. [뉴스1]

서울시내 한 명품매장 앞에서 ‘오픈런’을 위해 소비자들이 기다리고 있다. 최근 자동차 시장에서도 차량 가격의 상승으로 저렴한 차량 구입이 어려워지고 있다. [뉴스1]

‘오늘 사는 샤넬 핸드백이 가장 싸다.’ ‘오늘 사는 롤렉스 시계가 가장 싸다.’ 처음엔 우스갯소리로 들렸다. 그런데 ‘오픈런’(매장 문 열면 뛰어가서 구매) 현상의 일상화로 불문율이 됐다. 그리고 이를 자동차 시장에 빗대어도 마찬가지인 세상이 왔다. 자동차 신차 가격이 갈수록 비싸지고 있어서다.

저렴한 자동차 줄어들어

이호중 한국자동차연구원(KATECH) 책임연구원은 “차량 가격이 전 세계적으로 상승하는 ‘카플레이션’(Carflation, Car+Inflation) 현상은 2020년 하반기부터 자동차용 반도체 공급난과 제조원가 상승 등 복합적 원인으로 일어났다”며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완성차 업계의 수익성 우선 전략과 환경 규제 강화로 시장에서 저렴한 차가 줄어드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반도체 장착 없이 만들어진 차량이 지난해 미국 GM 플린트 공장 외곽에 주차돼 있다. [AP=연합뉴스]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으로 반도체 장착 없이 만들어진 차량이 지난해 미국 GM 플린트 공장 외곽에 주차돼 있다. [AP=연합뉴스]

카플레이션의 단초를 제공한 건 자동차용 반도체의 공급난이다. 자동차 업계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소수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가 독과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올해 들어 터진 러-우 전쟁은 기름을 부었다.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러시아산 네온·팔라듐과 우크라이나산 와이어링 하네스(전선 뭉치) 등 부품 공급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러-우 전쟁으로 카플레이션 심화  

러시아 경제 제재에 따른 국제 유가 상승과 육·해상 운송 제한에 따른 물류비용 증가도 카플레이션을 부추겼다.
헤르베르트 디스 폭스바겐그룹 회장은 최근 “러-우 전쟁이 코로나19 이상으로 자동차 산업에 악영향을 끼치고, 엄청난 자동차 가격 상승을 야기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수급 현상과 별개로 저렴한 자동차는 이미 완성차 업계의 눈 밖에 났다. 수년 전부터 대당 이익률이 낮은 소형 세단과 해치백 생산을 줄였다. 대신 수익성이 높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대형 고급 차종의 비중을 높여나갔다.

게다가 반도체 공급난의 대책으로 수익성이 높은 차종을 더 많이 생산하는 곳이 늘고 있다. 판매 대수 감소에 따른 실적 하락을 상쇄하려는 전략이다.

여전히 비싼 전기차

환경 규제에 따른 전기차 시대의 조기 개막도 현재 시점에서는 차량 가격에 부담을 주고 있다. 자동차 전문 평가업체 켈리블루북(KBB)이 전기차만 생산하는 테슬라를 지난해부터 조사 대상에 포함시키자 미국 신차 판매 가격이 단번에 4만 달러(약 5100만원)를 돌파했다.

지난 3월 경기도 하남~남양주~가평에서 열린 제네시스 중형 SUV ‘GV70 전동화 모델’ 시승 행사. 남양주=강병철 기자

지난 3월 경기도 하남~남양주~가평에서 열린 제네시스 중형 SUV ‘GV70 전동화 모델’ 시승 행사. 남양주=강병철 기자

현대자동차그룹 고급 브랜드 제네시스의 중형 SUV GV70만 봐도 알 수 있다. 2022년형 가솔린 2.5L 터보 모델의 기본 가격은 4995만원이다. 그런데 올 초 출시한 전동화 모델의 기본 가격은 7809만원이다.

세부 옵션과 전기차 보조금을 고려하지 않고 본다면 두 모델의 가격 차이가 3000만원 가까이 난다. 이는 전기차 가격의 30~50%를 차지하는 배터리 가격 때문에 생긴 것이다.

자동차용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니켈 값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폭등했다. 사진은 지난해 포스코가 지분 30%를 인수한 호주 니켈 광산의 모습. [연합뉴스]

자동차용 배터리의 핵심 소재인 니켈 값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폭등했다. 사진은 지난해 포스코가 지분 30%를 인수한 호주 니켈 광산의 모습. [연합뉴스]

문제는 배터리의 원자재 가격이 올해 들어 심상치 않다는 점이다. 배터리의 핵심 광물인 니켈 가격이 올랐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세계 3위 니켈 생산국인데 러-우 전쟁 이후 공급 불안으로 폭등세를 보였다. 지난 3월 t당 4만5795달러까지 올랐다. 지난해 말(2만925달러)의 두 배 수준 이상으로 급등한 것이다.

배터리 소재 니켈 값 급등

니켈은 리튬이온 배터리의 핵심 소재로 양극재에 60% 이상 들어간다. LG에너지솔루션 등은 니켈을 90% 이상 함유한 하이니켈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도원빈 국제무역통상연구원 연구원은 “러-우 전쟁 이후 공급 차질에 대한 불안으로 국제 원자재 가격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며 “배터리 등 전기차 전환의 주요 소재인 니켈은 주요 비철금속 중 가장 큰 폭의 상승세를 기록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시장 전기차 판매량 추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글로벌 시장 전기차 판매량 추이.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전기차는 당장 차량 가격 상승의 원흉으로 꼽히지만, 장기적으론 저렴한 자동차를 공급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는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이자 전기차 경쟁력이 상대적으로 높은 중국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20년 출시된 ‘홍광 미니 EV’가 눈에 띈다. 기본 가격이 2만8800위안(약 550만원)이다. 중국 상하이기차와 우링이 미국 제너럴모터스(GM)와 합작해 내놨다. 출시 이후 테슬라 모델3·모델Y보다 더 많이 팔리며 자국 전기차 판매량 1위 자리를 달리고 있다.

중국에서 500만원대 가격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홍광(宏光) 미니 EV. [사진 우링]

중국에서 500만원대 가격으로 인기를 모으고 있는 홍광(宏光) 미니 EV. [사진 우링]

전기차는 부품 수가 2만 개 이하로, 3만 개가 넘는 기존의 내연기관 차량보다 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테슬라가 고가의 고성능 전기차와 허세 마케팅으로 시장을 주도하면서 ‘전기차=비싼 차’라는 인식을 줬지만, 전기차의 가격은 향후 계속 내려갈 거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미 ‘반값 전기차’로 조금씩 시장에 변화를 주는 곳이 있다.

전기차 업계의 ‘샤오미’로 불리는 중국 링파오가 내놓은 반값 전기차 C11. [사진 링파오]

전기차 업계의 ‘샤오미’로 불리는 중국 링파오가 내놓은 반값 전기차 C11. [사진 링파오]

전기차 업계의 ‘샤오미’로 불리는 링파오가 선두에 있다. 홍광 미니처럼 옵션을 줄여 500만원대에 내놓는 것이 아니라, 자율주행 기능 등을 제대로 넣고도 반값에 공급하는 방식이다. 주장밍(朱江明) 링파오 회장은 지난해 전기 SUV C11을 출시하면서 “50만 위안(약 9500만원)대의 기술이 들어간 차를 20만 위안(약 3800만원) 아래로 공급하는 것”이라며 “전기차 시장의 모순 현상을 깨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전기차 브랜드별 판매량.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지난해 전기차 브랜드별 판매량.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반값 전기차 움직임은 기존 완성차 업체에서도 서서히 보이고 있다. 홍광 미니의 성공에서 기회를 엿본 미국 GM이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GM은 지난달 일본 혼다와 함께 3만 달러(약 3800만원) 수준의 전기차를 2027년부터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매리 바라 GM 회장은 “운전자가 원하는 저렴한 전기차를 생산하기 위해 혼다와 제휴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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