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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전승절 폭탄선언 없었지만…"서방 침략 선제대응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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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확전 포고도, 일말의 기대를 모은 종전선언도 없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입에선 우크라이나 사태의 책임을 미국과 서방에 돌리고 침공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독설만 쏟아졌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 전승절을 기념하는 열병식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9일 전승절을 기념하는 열병식에 참석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푸틴 대통령은 9일 나치 독일에 대한 연합국의 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77주년 전승절 열병식에서 약 10분간 이번 침공이 '정당방위'라는 취지로 연설했다.그는 "미국 등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국가로부터 현대적 무기가 (우크라이나에) 이송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면서 "국경에선 적극적으로 군사 개발을 시작했고, 크림반도를 포함한 우리 땅에 침공하려고 했다. 키이우에선 핵무기 획득 가능성도 발표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러시아는 (서방의) 공세에 대한 선제 대응을 했다"면서 "이는 불가피하고 시의적절하며 유일하게 올바른 결정이었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는 "다른 평화로운 수단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기회가 한 번이라도 있다면 당연히 이 기회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서 "모두 용감하게 싸우고 있다. 특별군사작전에서 결과가 달성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 벨라루스 등 우호국 지도자들에게 보낸 77주년 메시지를 통해선 "불행하게도 여러 나라를 고통스럽게 한 나치즘이 다시 고개를 들고 야만적인 질서를 강요하고 있다"며 "우리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병사들이 나치 쓰레기로부터 해방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1945년처럼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으로 주장하는 '탈나치'를 되풀이한 것이다.

이번 행사에 앞서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와 서방에 핵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지만 관련 메시지는 없었다. 푸틴 대통령은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친러 반군 세력에 대한 지원·격려와 함께 이번 작전에서 숨진 러시아 군인들의 유족에 대한 지원 등을 약속했다.

BBC는 전승절 연설에 대해 "푸틴 대통령의 다음 행보에 대한 실질적인 단서가 없었다"고 전했고, CNN은 "전쟁 지역을 우크라이나 전체가 아닌 돈바스 지역만 언급했지만, 러시아가 전쟁에서 물러서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고 해석했다.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전승절 열병식이 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전승절 열병식이 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열병식 규모는 지난해와 비교하면 되레 축소됐다. 러시아 국영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모스크바 열병식에는 군인 1만1000명이 참가하고, 군용 차량 131대와 헬리콥터 및 항공기 77대 등이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군인 약 1만2000명이 참가하고 군용 차량 190여대 등이 동원됐다.

특히 기상 악화로 공중 군사 퍼레이드가 전부 취소되면서 12년 만에 열병식 등장이 예고됐던 '일류신(IL)-80 둠스데이(Doomsday·최후의 날)'는 보이지 않았다. IL-80 둠스데이는 핵전쟁 발발 시 대통령과 군 수뇌부가 탑승하는 공중 지휘기다. 8대의 미그(MiG)-29SMT 전투기가 알파벳 'Z' 모양(우크라이나 침공 지지하고 승리 기원 의미)으로 비행하는 쇼도 무산됐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유리 표도로프 러시아 군사 분석가를 인용해 "러시아가 공중 지휘기를 제외해 핵 긴장을 높이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 있다. 서방의 후속 대응을 우려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대신 RS-24 '야르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이스칸데르' 단거리탄도미사일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2010년에 실전 배치된 야르스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망을 뚫을 수 있는 ICBM으로 평가된다.

열병식 이후 모스크바 중심가에서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2차대전에 참전했던 선조들의 사진이나 초상을 들고 약 7㎞를 행진하는 '불멸의 연대' 행사가 진행됐다. 이 행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로 인해 지난 2년간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마리우폴 주민들이 8일 식량을 얻기 위해 거리에 모였다. 로이터=연합뉴스

마리우폴 주민들이 8일 식량을 얻기 위해 거리에 모였다.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점령지에서는 요란한 열병식이 펼쳐지지 않았다. 친러 반군 세력인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의 데니스 푸실린 수장은 "우크라이나군 도발 위험으로 전승절 열병식은 열리지 않는다"고 전했다. 불멸의 연대 행사도 온라인상에서 치러졌다. 러시아군이 거의 장악한 동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도 대대적인 행사는 없었다.

대신 마라트 후스눌린 러시아 부총리가 8일 마리우폴·볼노바하 등 러시아군이 점령한 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을 방문했다고 CNN이 보도했다. 후스눌린 부총리는 텔레그램을 통해 방문 사실을 알리며 "이 지역에서 평화로운 삶을 위한 재건 작업이 시작됐다. 인도적 지원을 제공하는 등 많은 부분에서 우리가 도울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페트로 안드루셴코 마리우폴 시장 보좌관은 "이 같은 방문으로 점령 지역을 러시아에 직접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전승절을 앞두고도 러시아의 공격은 계속됐다. 러시아군은 지난 7일 동부 루한스크 지역 빌로호리우카의 대피처로 쓰이던 학교를 폭격했다. 당시 90여명이 대피해 있었는데 30여명만 구출됐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8일 "이 공격으로 민간인 60여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한편 아일랜드 록밴드 U2의 리드싱어 보노와 기타리스트 디에지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8일 수도 키이우의 지하철역에서 40분간 즉석 공연을 했다고 로이터·블룸버그 통신 등이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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