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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 탈골 부상 투혼…발레리나 이은원에 쏟아진 美기립박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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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발레단이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지젤' 사진. 이은원 수석무용수가 열연 중이다. [the Washington Ballet instagram]

워싱턴발레단이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지젤' 사진. 이은원 수석무용수가 열연 중이다. [the Washington Ballet instagram]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의 워너극장. 내후년이면 창립 100주년이 되는 이 유서 깊은 극장 무대의 붉은색 막이 올랐다. 워싱턴발레단이 팬데믹 와중에도 야심차게 준비해 올린 ‘지젤’ 무대다. 오프닝 공연이기에 의미가 더 큰 이날 저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한국인 발레리나, 이은원 수석무용수였다.

한국 국립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맹활약하다 워싱턴발레단을 이끄는 줄리 켄트에 스카우트된 무용수다. 이은원 수석은 2014년엔 한국 문화계를 대표해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와 함께 2014년 러시아 소치 겨울올림픽 캠페인 영상에 나란히 등장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한국인 무용수들은 은원 씨뿐 아니라 뉴욕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서희 씨와 파리오페라발레단(POB)의 박세은 씨,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 김기민 수석무용수 등 여럿이다.

이은원 무용수를 눈여겨보고 스카우트한 켄트 예술감독 역시 세계적 발레리나다. 켄트 예술감독은 이날 공연에 앞서 무대에 올라 “’지젤’은 클래식 발레 작품 중에서도 중요한 대표작”이라며 “이번에 ‘지젤’로 데뷔하는 우리 발레단의 무용수들을 앞으로도 주목해달라”고 주문했다. 은원 씨도 국내 아닌 해외 무대에선 이날 처음 ‘지젤’을 췄다. 그는 공연 후 중앙일보와 만나 “오프닝 공연은 발레단이 관객께 선보이는 첫 무대라서 더 긴장하고 (공연을 성공으로 스타트를 끊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많이 든다”며 “첫 ‘지젤’을 잘 마무리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눈을 반짝였다.

지난달 28일 오프닝 공연의 팸플렛에 이은원 수석무용수의 이름이 보인다. 전수진 기자

지난달 28일 오프닝 공연의 팸플렛에 이은원 수석무용수의 이름이 보인다. 전수진 기자

대다수 관객은 몰랐지만 그의 오른쪽 어깨엔 부상 방지용 테이핑이 되어 있었다. 공연 관계자는 중앙일보에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어깨 탈골 부상을 입었다”며 “공연 내내 재발하지 않을까 했지만 의연히 마쳤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공연 약 2시간 내내 그가 부상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어려울 정도로 그는 파드되(pas de deux, 2인무) 리프트 동작이며 점프 및 턴을 완벽히 소화했다. 관객은 뜨거운 기립박수로 화답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부상 투혼이 빛났습니다. 공연 중에도 많이 힘드셨을 텐데요.  
“어깨 탈구가 여러 번 돼서 테이핑으로 고정하고 무대에 올랐어요. 공연 후엔 수술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상이 있는 상태로 공연을 하게 되니 아무래도 테크닉을 하다 어깨가 또 빠질까봐 심리적으로 불안했는데요. 그래서 더욱 더 지젤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하려고 노력했어요.”  
은원 무용수의 테크닉이 뛰어난 것은 더 이상 놀라운 사실이 아닌데, 이번 무대는 감정 표현이 풍부해졌다는 느낌을 새삼 받았습니다.  
“(켄트) 단장님이 드라마, 즉 표현을 강조하셨어요. (지젤이 꽃 점을 치기 위해) 꽃잎을 한 장 한 장 떼어내는 사소한 동작 하나하나부터, 1막과 2막까지 드라마를 어떻게 이끌어 나가고 내용을 완성시키는지가 중요하다고 해주셨죠. 스토리텔링의 큰 의미를 배웠어요.”  

순진무구한 평민 아가씨 지젤이 신분을 속인 귀족 청년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졌다가 목숨을 잃는다는 게 1막의 줄거리다. 2막에선 지젤처럼 사랑 때문에 목숨을 잃고 요정이 된 이들이 알브레히트를 죽이려고 하지만 지젤이 그와 함께 동틀 때까지 춤을 추며 구해준다는 내용이 펼쳐진다. 이은원 무용수는 표정뿐 아니라 손끝으로도 감정을 표현해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지젤’ 2막에선 특히나 이 세상 것이 아닌(otherworldly) 수준의 연기가 필수인데 이번 워싱턴발레단의 무대는 월등했다”고 극찬했다.

'지젤'의 묘미인 군무. 발레단의 수준은 군무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the Washington Ballet instagram]

'지젤'의 묘미인 군무. 발레단의 수준은 군무로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the Washington Ballet instagram]

이은원 수석무용수가 ‘지젤’로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립발레단에서도 훌륭한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 그는 “10년 전 ‘지젤’을 처음했을 때나 지금이나 발레를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다”며 “다만 무용수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살아오며 쌓은 경험들이 좀 더 풍부해졌고, 표현하고 싶은 감정들이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겸손함이 묻어나는 소감이다.

무대에 설 땐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사실, 무대에서 춤을 출 땐 따로 생각을 하지 않게 돼요. 가끔은 ‘내가 어떻게 췄지?’라고, 기억이 안 날 때도 있어요. 다만 무대가 항상 참 따뜻하다고 느껴져요. 조명이 저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느낌이 들죠. 그래서 무대 위의 매 순간이 점점 더 소중해집니다.”  

워싱턴발레단은 다양한 레퍼토리를 실험하는 것으로도 인지도가 높다. 6월에도 현대발레를 올린다. 이은원 수석은 이번엔 부상 수술로 참여 못하지만 앞으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고 싶다는 포부를 분명히 했다. 그는 “제 마음 속에는 현대 발레와 클래식 발레의 경계선은 없다”며 “앞으로도 계속, 감사한 마음으로 다양한 춤을 계속 추고 싶다”고 말했다.

이은원 무용수가 지난해 중앙일보 '그 셀럽의 반려생활'에 반려견 초코와 함께 등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이은원 무용수가 지난해 중앙일보 '그 셀럽의 반려생활'에 반려견 초코와 함께 등장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상조 기자

그에게 1년 후와 5년 후 10년 후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더니 우문 현답이 왔다. “계속 춤을 추고 싶다는 생각만 있을 뿐 1년 5년 10년 후의 계획은 없어요. 하루하루, 제 앞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충실하게 살아가고 싶어요.”

한국 무용수들의 세계적 선전에 대해 그는 “한국 무용수들만의 특징이 있다기 보다는, 다들 끈기와 책임감이 강한 것 같다”며 “같은 한국인으로서 모두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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