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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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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상상할 수 없는 삶은 없지만, 그 삶에서 비롯된 상상까지 담으려면 뼈와 살과 피와 맘을 나도 쏟아야 한다. 장편을 쓸 때는 이와 같은 거래가 필수다. 등장인물이 달라지는 동안 나도 달라진다. 돌이킬 수 없는 동행이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인생.

김탁환 『김탁환의 섬진강 일기』

“이제 소설에서 죽여야 할 사람이 다섯 명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1월 죽일 사람이 백 명일 때는 언제 다 죽이나 싶고, 죽여가며 또 얼마나 쓰라리고 안타까울까 싶었는데, 오늘 새벽 마지막 다섯 명을 형장에 세우니, 아, 정말 제대로 잘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서울에서 전남 곡성으로 집필실을 옮긴 김탁환은 초보 농사꾼으로 살며 새 장편 소설을 쓰고 있다. 소설에 앞서 1년간 적응기를 일기 형식으로 펴냈다. 달라진 공간은 그의 소설을 어떻게 바꿀까. 다음 같은 문장들에 힌트가 있다. “대도시의 집필실에서 밑줄 그은 문장들과는 전혀 다른 문장들이 걸어와선 내 몸을 밀치고 내 맘을 긁어댄다.” “손가락 열 개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려 소설을 쓰면서부터는 엄지와 검지만으로 두세 시간 집중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가끔 펜을 쥐고 끼적이기라도 하면 예전의 내 필체가 아니라서 당황스러웠다. 오늘 모를 심노라니, 모를 쥐고 논바닥에 글을 쓰는 기분이었다. 긴 소설은 아니고 한 줄로 완성되는 하이쿠 같다고나 할까. 백 개를 심으면 백 개가 다 다른데, 옆에 선 사람이 심은 것과 비교하면, 내가 심은 모들끼리 엇비슷한 구석이 또 있었다.” “오전엔 글밭, 오후엔 텃밭. 마음을 뒤집듯 흙을 뒤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