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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원영의 이의있는 고발

한번도 경험 못한 불통의 공론장…막 내린 '국민애원' 게시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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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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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중앙일보 오피니언 기획 시리즈 '나는 고발한다. J'Accuse...!'는 윤석열 정부 출범(10일)에 맞춰 새 정부에 바라는 20대의 가감없는 목소리를 전하는 번외편 '이의(이십대 의견)있는 고발'을 일주일 동안 연속으로 내보냅니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정권에 등을 돌린 20대는 공정에 대한 기대로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당선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후퇴 조짐을 보이는 여러 주요 공약 등으로 벌써부터 이들의 지지가 흔들린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들이 차기 정부에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 속마음을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5년 내내 문재인 정부의 히트 상품으로 포장했지만 부정확한 사실로 사회적 갈등만 양산한다는 비판 끝에 결국 오늘(9일) 운영을 접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비판하는 최원영 학생(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의 글을 시작으로 월급 200만원 공약으로 이대남의 마음을 움직였던 군대 문제, 국민 고통에도 아랑곳없이 마지막까지 자화자찬에만 열을 올렸던 K방역, 문과 취준생의 아픔, 젠더 갈등 등 20대의 주요 관심사에 대한 글이 차례대로 나갑니다.
20대 남녀가 고루 섞인 이번 '이의있는 고발' 필진은 그동안 '나는 고발한다' 칼럼에 논리적 의견이 담긴 댓글을 달았던 애독자, 그리고 지난달 독자 칼럼 이벤트 응모자 가운데 주제 등을 고려해 선정된 분들입니다. 독자 칼럼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내보낼 예정입니다.

문재인 정부의 출범은 시민 공론장의 성취라고 확신했다. 촛불로 정권을 바꾸는 그 생동하는 교과서를 직접 목격하면서, 미디어를 전공하는 게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이전 박근혜 정부의 수첩(불통)은 물러가고 공론장(소통)이 활짝 열릴 거라 믿었다. 그리고 문 정부 출범 100일만인 2017년 8월 19일, 청와대 국민청원이라는 소통의 장이 정말 열렸다.

처음엔 기대가 컸다. 성 소수자와 장애인, 독거노인 등 그간 우리 사회에서 조명받지 못한 소외계층의 정책적 의제를 발굴하는 기회가 될 거라 믿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도 논리적으로 대화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돌이켜보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공론장은커녕 누가 더 잔혹하고 억울한 이야기로 더 많은 공분을 살 수 있는지 경쟁하는 지옥문이 열렸을 뿐이었다.

청원 단골 주제는 살인·(성)폭행·참변

지난 5년 동안 가장 많은 동의를 받은 비정치 분야 청원의 주요 키워드가 살인·(성)폭행·참변이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처벌과 엄벌이었다. N번방 사건같은 디지털 성범죄부터 민식이법을 낳은 어린이 보호구역의 교통사고에 이르기까지 무슨 사건이 벌어지기만 하면 처벌 만능주의의 여론재판이 판쳤다.

이게 국민청원 게시판을 만든 문재인 정부의 의도였을까. 국민과의 소통을 내세워 국민청원 시스템을 만들었지만 정작 문 정부는 얘깃거리를 선택적으로 축소하며 어쩌면 정부로 향했을 비판의 화살을 국민 서로가 서로를 향해 쏘도록 했다. 지난 2020년 7월 성추행 의혹으로 스스로 세상을 등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葬)을 반대하는 청원에 무려 59만 6000여명이 동의했는데도 청와대는 400자가 안 되는 짧은 서면으로 국민의 의사를 무시했다. 이 사건 전까지는 동의 20만을 넘긴 181건의 청원에 대해선 대법관 자격 박탈처럼 삼권분립을 건드리는 민감한 사안을 제외하곤 청와대나 관계 부처 담당자가 영상으로 직접 답하는 게 관례였다. 위안부 할머니 착취 의혹을 받은 윤미향 사건, 원전 경제성 조작 의혹도 다 마찬가지다. 한마디로 청와대는 겉으로는 소통하겠다면서 전보다 더 굳게 닫혀 있었다.

지난달 26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국민청원 답변 영상 촬영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지난달 26일 청와대 여민관 집무실에서 국민청원 답변 영상 촬영을 하는 문재인 대통령. [뉴시스]

국민청원이 아니라 국민애원 

이처럼 쓴소리에는 입과 귀를 닫고 사회적 갈등을 확대재생산 하는 동안 국민청원 게시판은 그야말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흙탕물 공론장이 됐다. 매일 600여 건씩 올라오는 건 국민청원이 아니라 국민애원이었다. 정제 안 된 분노와 검증 안 된 호소가 점령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김보름·박지우 선수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을 요구한 청원(61만 4000 동의)은 전 국민이 한 뛰어난 국가대표 선수를 왕따 시키는 판을 열어젖혔다. 지난해 4월엔 한강에서 음주 후 사망한 의대생 손정민 씨의 친구를 살인자로 모는 청원은 52만 1000건 이상의 동의를 받으며 음모론을 달궜다. 청와대는 국민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는 명분을 편리하게 챙기면서 울분과 분노의 과포화에 따른 역기능엔 눈을 감았다.

돌이켜보니, 단지 눈만 감았던 게 아니다. 무성의한 답변과 홍보성 발언으로 화를 돋운 적도 많았다. 가령 지난해 12월, 38만 6000여 명이 참여한 백신패스 반대 청원에 대해선 백신 접종의 긍정적 효과만 강조해, 기본권 침해를 재고해달라는 청원 요지를 빗나갔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런 일은 지난 5년 동안 비일비재했다.

거짓 정보 유통에도 책임 

거짓이 무분별하게 유통되는 부작용에도 국민청원이 큰 역할을 했다. 지난 3월 한 친구가 “너도 얼른 동의하라”며 링크 하나를 보내왔다. 택시 운행 중 뛰어내려 숨진 한 포항 여대생 사연이었다. 청원자인 숨진 여대생의 동생은 '택시 기사가 나쁜 의도를 갖고 누나가 원한 목적지와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갔다'고 주장했다. 이미 국민청원 게시판을 넘어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에선 택시 기사에게 칼날을 들이밀고 있었다. 이틀 후 블랙박스가 공개돼 단순 소통 오류라는 게 드러났다. 국민적 분노의 땔감을 태운 인기 글 상당수는 삭제돼 이젠 찾을 수도 없다. 확인되지도 않은 사안에 대해 전 국민적 응징이 가해지면서 무고한 피해자가 속출하는 사례는 이외에도 많다. 익명의 손가락이 가한 인격 살인에 청와대 국민청원은 책임이 없을까.

택시에서 뛰어내려 숨진 여대생의 동생이 올린 청원. 블랙박스 기록을 통해 택시기사의 수상한 행동이 아니라 소통 오류에 의한 희생이라는 게 드러났다.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택시에서 뛰어내려 숨진 여대생의 동생이 올린 청원. 블랙박스 기록을 통해 택시기사의 수상한 행동이 아니라 소통 오류에 의한 희생이라는 게 드러났다. [국민청원 게시판 캡처]

온라인 속 혼탁한 국민청원은 오프라인 현실 속에선 거꾸로 침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2016년만 해도 수업 질의응답 시간에 성차별과 관련한 남녀 학생 간 논쟁이 이어졌다. 이때는 불편해도 얼굴 마주 보며 토론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청원을 겪은 5년 뒤, 세상은 완전히 달라졌다. 수업 중 교수가 의견을 물어도 대부분 침묵한다.

지난해 미디어 전공 수업 중 한 교수님이 여성혐오 논란 끝에 퇴출당한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던 순간을 기억한다. 모두 일시 정지 상태가 됐다. 평소엔 발언권을 조정해야 할 만큼 참여가 활발한 토론식 수업이었지만 젠더 문제 앞에선 모두 입을 다물었다. 이 이슈는 분명 ‘에브리타임’(대학별 커뮤니티 앱) 최상위 인기 글이었는데도 강의실의 남녀 학생은 갈등을 마주하기 꺼렸다. 남과 다른 생각을 드러내는 순간 얼마나 물어뜯기는지 모두 알고 있는 마당에 그런 무모한 용기를 낼 이유가 없다. 정작 필요할 때 말하는 법을 잊게 된 셈이다.

고별을 알리는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게시판 캡처]

고별을 알리는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게시판 캡처]

자화자찬으로 막 내린 청원 게시판 

문재인 대통령은 윤석열 정부의 출범을 앞두고 오늘(9일) 운영을 접는 국민청원 게시판에 '세상을 바꾼 국민청원 5년, 함께 해주신 국민 덕분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었습니다'라고 자화자찬성 홍보 문구를 남겨 놓았다. 앞서 지난달 29일 문 대통령이 직접 나서 답한 가장 마지막 청원은 청원이라 할 수도 없는 팬클럽 회원들의 아이돌을 향한 사랑 고백과도 같은 28만명의 동의를 받은 ‘문재인 대통령님 사랑합니다’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 5년 동안 언제나 과분한 사랑과 지지를 보내주셨고, 위기와 고비를 맞이할 때마다 정부를 믿고 힘을 모아주셨다. 퇴임 이후에도 국민의 성원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국민 모두 느꼈던 국민청원 게시판에 대한 아쉬움과 비판에 대한 반성은 어디에도 없었다.

내일(10일) 취임하는 윤석열 정부는 좀 달랐으면 좋겠다. 사회 갈등을 정부가 앞장서 풀어내겠다는 비현실적 약속은 듣고 싶지 않다. 다만 갈등을 풀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은 정부가 제공했으면 한다. 선택적 분노를 꼬드겨 갈등만 유발하는 국민청원이 아니라 당선인을 비롯해 모두 경청하는 공론장 하나쯤 가질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최원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

최원영 고려대 미디어학부 4학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