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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28년, 5대째 한국팬…'유퀴즈' 뒤집은 특별귀화자 [속엣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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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추기자의 속엣팅

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 속엣말을 들어봅니다. 그 인연을 통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인연 따라 무작정 만나보는 예측불허 릴레이 인터뷰를 이어갑니다.

 [프롤로그]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카이슨은 명문인 뉴욕 브롱스 과학고 재학 시절 연예인을 꿈꾸며 “학교 공부는 SAT까지만 하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때 그의 튜터이자 멘토가 조선 왕조부터 지금까지 5대째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는 미국 린튼가(家)의 대학생이었는데요. 국가유공자 특별귀화자인 데이비드 린튼(인대위) 한동대 국제법률대학원 교수입니다. 제임스가 출연한 TV를 보고도 몰라봤다는 린튼 교수는 ‘속엣팅’의 주선으로 약 30년 만에 재회했답니다.    

서태지 충격에 할리우드 배우 됐다…美명문고생의 반전인생

한국계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카이슨(47)은 명문 과학고에 다니다가 잠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서태지와 아이들’을 보고 연예인을 꿈꿨다.

2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데이비드 린튼 한동대 교수. 외고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부터 128년째 한국 사랑을 실천 중인 린튼 가문의 자손이다. 김현동 기자

2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데이비드 린튼 한동대 교수. 외고조부인 유진 벨 선교사부터 128년째 한국 사랑을 실천 중인 린튼 가문의 자손이다. 김현동 기자

“저는 학교에 배우러 왔지, 어른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온 게 아니에요.” 초등학교 때 어린이 연극을 하지 않겠다던 데이비드 린튼(50) 교수는 그 이유를 묻는 선생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지난 2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 사옥에서 만난 린튼 교수는 “(선교사였던)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부모님은 ‘남들이 하는 일을 따라 하기보단 옳은 것을 하라’고 가르치셨다”면서다.

외고조부부터…5대째 이어진 한국 사랑   

린튼가는 128년째 한국과 인연을 맺고 있다. 린튼 교수의 외고조부 유진 벨(1868~1925) 목사는 1895년 조선에 들어와 평생 학교와 의료시설 건립에 헌신했다. 그의 딸 샬럿 벨(인사례) 여사와 결혼한 윌리엄 린튼(인돈ㆍ1891~1960) 박사도 한국에서 활동한 교육 선교사로, 1919년 3ㆍ1운동 당시 일본의 잔혹 행위를 미국에 알리고 한남대학교를 설립했다. 그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인휴ㆍ1926~1984) 목사가 린튼 교수의 할아버지다. 그는 한국에서 결핵 치료 센터와 시골 직업학교를 후원했다.

데이비드 린튼 교수는 2007년 한국에 정착한 후 2014년 귀화했다. 김현동 기자

데이비드 린튼 교수는 2007년 한국에 정착한 후 2014년 귀화했다. 김현동 기자

린튼가의 4대 중 3명은 여전히 한국에서 활동 중이다. 휴 린튼의 장남이자 린튼 교수의 아버지인 데이비드 역크 린튼(73)은 그의 아버지가 지은 순천 집에 살면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고, 둘째 스티븐 린튼(인세반ㆍ71) 박사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해 북한 결핵 환자 치료를 돕고 있다. 한국형 구급차 개발자이자 특별귀화자 1호인 존 린튼(인요한ㆍ63) 연세대학교 의학 교수가 막내다. 린튼 교수는 어릴 때 잠시 한국에서 살았던 때를 제외하곤 미국에서 자랐지만, 지난 2007년 한국에 정착한 후 2014년 귀화했다. 지난해엔 tvN ‘유퀴즈’에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 중퇴 무산…수업 직접 개설 

그는 명문 컬럼비아대를 졸업했지만, “학교 공부보다는 다른 걸 더 많이 배우러 다녔다”고 했다. 고등학교 때 “학교는 배우고 싶은 걸 가르치지 않는다”면서 중퇴하려고 했지만, 부모님이 반대하자 없던 수업을 직접 개설했다. ‘학생 20명 이상이 원하면 학교는 수업을 개설해야 한다’는 교칙을 발견하고서다. 친구들을 모아 3개 과목 수업을 개설했다. 여름방학 땐 대학에서 별도로 수업을 들었고, 기업 장부 정리나 카펫 클리닝 영업 등 아르바이트도 쉬지 않았다.

학창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고 책과 잡지를 즐겨 읽었다는 린튼 교수는 "학교 공부는 평점 3.5로 가까스로 상위 10%에 들었다"고 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김현동 기자

학창시절 내내 아르바이트를 쉬지 않았고 책과 잡지를 즐겨 읽었다는 린튼 교수는 "학교 공부는 평점 3.5로 가까스로 상위 10%에 들었다"고 했다. 컬럼비아 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김현동 기자

그러다 보니 학교 공부엔 비교적 소홀했다. 그는 “평점 3.5로 가까스로 상위 10%에 들었다”고 했다. 12학년(고3) 때 미적분학 F를 받아 당시 지원했던 컬럼비아대 입학처에서 고등학교에 전화가 오기도 했다. 이에 진로 담당 교사가 “수학 못 한다고 남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고, 몇 주 후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대학에선 “가장 실용적인” 철학을 전공했지만, 그는 독서엔 과학과 기술, 비즈니스 등 영역을 가리지 않았다. 잡지만 한 달에 20~30권을 읽었다. 대학교 3학년 땐 서울대학교를 다니면서 신림동에서 한국인 친구들과 살며 한국어를 배웠다.

린튼 교수는 워싱턴DC의 비영리기구 ‘리더십 인스티튜트’에서 인턴십을 거쳐 직장인이 됐다. 재단 기부자와 장학생을 인터뷰하고 데이터 분석 등 다양한 업무를 했다는 그는 “재단에서 배운 것을 지금도 매일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도 한인 교회에 다니고, 주미 한국 대사관에서 일하며 한국과의 연을 이어갔다. 로스쿨을 졸업한 뒤 앨라배마주 대법원 소속 변호사를 거쳐 2007년 법무법인 율촌으로 오면서 한국에 정착했다. 그는 “한국엔 늘 다시 오고 싶었다”며 “그땐 외국인이었지만, 귀향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대기업, 스타트업으로…“창업가가 혁신 주도”

린튼 교수는 한국의 미래가 '앙트레프레너십'(기업가 정신)으로 혁신을 주도할 창업가에 있다고 믿는다. 김현동 기자

린튼 교수는 한국의 미래가 '앙트레프레너십'(기업가 정신)으로 혁신을 주도할 창업가에 있다고 믿는다. 김현동 기자

그가 2011년 CJ ENM으로 옮긴 건 로펌에선 다룰 기회가 많지 않은 비즈니스를 경험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그가 만든 법무팀은 2년 연속 국내 최고 사내법무팀으로 인정받기도 했다. 지난 2014년 귀화를 택했다. 그는 “독립유공자 후손은 한국어 능력 시험을 안 봐도 돼서 다행이었다”며 웃었다. 이듬해 국내 스타트업에 몸담으면서는 투자와 해외 진출, 창업가 교육 등 다양한 일을 진행했다. 그는 오는 10일 윤석열 대통령의 취임식에 국민희망대표로 초청받아 참석할 예정이다.

린튼 교수는 한국의 미래도 ‘창업가’들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는 “민간 부문의 영리 및 비영리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혁신을 주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창업가 양성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고픈 꿈도 있다. 그는 “한국의 교육은 경제발전을 따라잡기 위한 훈련에 집중했고 그 효과를 봤지만, 이제는 교육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은 개방적이고 유연해져야 합니다. 공부만 하기보다는 (학교 밖 사회에서) 더 많이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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