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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유권자 잡았다…독재자 아들∙딸 필리핀 지지율 1위 이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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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디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지난달 20일 필리핀 바탄가스주 리파에서 열린 유세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주니어가 지난달 20일 필리핀 바탄가스주 리파에서 열린 유세 집회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9일 치러지는 필리핀 대통령 선거에서 ‘마르코스’와 ‘두테르테’라는 낯익은 이름이 주목받는다. 여론조사 1위를 달리는 대통령 후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64) 전 상원의원은 1960년대부터 20여년간 필리핀을 장기집권한 ‘아버지 마르코스’의 아들이다. 또 부통령 지지율 1위인 사라 두테르테 후보는 로드리고 두테르테 현 대통령의 딸이다. 외신은 유력 정치 가문이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필리핀의 ‘왕조정치’가 반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필리핀은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뽑는다.

5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 등에 따르면 필리핀 여론조사기관 ‘펄스 아시아’가 지난달 실시한 선거 전 마지막 여론조사에서 마르코스 후보는 56%의 지지를 얻어 2위 레니 로브레도 현 부통령(23%)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또 ‘복싱영웅’ 매니 파퀴아오 전 하·상원의원은 7%, 4위인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 시장은 4%를 차지했다.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 후보들. 왼쪽부터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시 시장,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 전 하·상원의원,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 판필로 락손 상원의원. [AFP=뉴스1]

2022년 필리핀 대통령 선거 후보들. 왼쪽부터 프란시스코 도마고소 마닐라시 시장, 페르난디드 마르코스 주니어 전 상원의원,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 전 하·상원의원, 레니 로브레도 부통령, 판필로 락손 상원의원. [AFP=뉴스1]

선거에서 승리한다면 마르코스 가문은 36년 만에 말라카냥궁(필리핀 대통령 관저)에 입성하게 된다. 그의 아버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지난 1986년 필리핀 민주화 세력에 의한 ‘피플파워’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민주화 세력은 21년간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인권을 유린한 마르코스에 맞서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으며, 결국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은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떠났고, 당시 28세의 마르코스 주니어도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그는 당시 대통령보좌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1년 하와이에서 돌아온 마르코스 주니어는 가문의 영향력이 살아 있는 일로코스노르테 지역에서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주지사·상원의원을 지내며 권력에 다가섰다. 2016년엔 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섰지만, 인권 변호사인 로브레도에 밀렸다.

시민권력에 의해 쫓겨난 전 대통령의 아들이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는 배경엔 일부 유력한 가문이 국가의 정치‧행정 권력을 독점하는 필리핀의 관례 때문이라고 외신은 전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필리핀 지방 관료의 약 80%, 국회의원의 약 67%가 필리핀 내 유력 가문 출신이다. 헤이메 나발 필리핀국립대 정치학부 교수는 “지지율 1위는 왕조 가문의 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부통령 후보 사라 두테르테도 마찬가지다. 두테르테 가문은 남부 민다나오에 기반을 둔 신흥 정치세력이다. 두 가문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2016년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국립묘지 안장을 허용한 이후 끈끈한 관계가 됐다. 사라 두테르테 후보는 펄스 아시아 여론조사에서 55%를 차지했고, 2위 빈센트 소토 상원의장은 18%에 그쳤다.

필리핀 대선 정·부통령 후보 '마르코스-두테르테' 반대 시위 모습. [EPA=연합뉴스]

필리핀 대선 정·부통령 후보 '마르코스-두테르테' 반대 시위 모습. [EPA=연합뉴스]

마르코스 주니어의 지지자 중 다수는 30세 미만의 젊은 유권자다.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아버지 마르코스의 철권정치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소셜미디어를 통해 다가가는 전략을 취했다.

조나단 코퍼스 미국 하버드대 부교수는 “독재 시절에 관한 근현대사 교육을 받지 않은 필리핀의 50대 이하가 전체 유권자의 52%를 차지한다”며 “잘못된 정보가 광범위하게 퍼져 젊은 층이 과거 독재를 정확히 이해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르코스 주니어 후보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천재적 지도자’로 내세우는 중이라고 로이터는 보도했다.

반면, 여론 조사 2위 후보인 로브레도의 지지율은 지난 3월(24%)보다 1%포인트 하락했다. 인권변호사 출신인 그는 2012년 항공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제시 로브레도 전 내무장관의 부인이다.

2016년 여성인권‧교육‧의료개선을 기치로 부통령에 당선됐으나, 인권 문제를 경시해 온 두테르테 대통령과 냉랭한 관계가 됐다. 그는 ‘부정부패 없는 정부’를 슬로건으로 200만 명에 달하는 자원 봉사자를 동원해 표몰이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까진 ‘약한 후보’라는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레니 로브레도 현 필리핀 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레니 로브레도 현 필리핀 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9일 선거에선 대통령·부통령과 함께 상원의원 12명, 하원의원 300명, 약 1만8000명의 지방 정부 공직자도 선출된다. 필리핀의 인구는 약 1억1000만 명으로 이중 유권자는 6750만 명이다. 선거 결과는 개표 후 수 시간 만에 나올 수 있지만, 2016년 대선에서 당선 확정은 선거일 이후 3주가량 지나 공식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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