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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명 살해한 '우 순경'…최악 총기난사 그 시작은 파리 한마리[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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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호 내셔널팀장의 픽: ‘위령탑 소원’ 40년 걸린 의령 유족들 

“빈총을 뭐하러 가지고 다니냐?” 

1982년 4월 26일 저녁 경남 의령군 궁류면. 상갓집에 있던 한 주민이 우범곤(당시 27세) 순경에게 건넨 말입니다. 우 순경이 술상 옆에 놓아둔 카빈총을 툭 치며 농담을 한 겁니다. 발끈한 우 순경은 갑자기 총을 집어 들더니 조문객들에게 닥치는 대로 총을 쏩니다. 당시 상갓집에서만 24명이 숨졌답니다.

우 순경 사건 직후 궁류지소 앞 모습. 오늘쪽은 지난달 20일 전종택씨가 궁류지소 쪽을 가리키며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우 순경 사건 직후 궁류지소 앞 모습. 오늘쪽은 지난달 20일 전종택씨가 궁류지소 쪽을 가리키며 사건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중앙포토

“소총 난사해 62명 사망, 33명 부상”

총기 소지가 합법인 해외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닙니다. 1982년 4월 26일 경남 의령군에서 벌어진 이른바 ‘우 순경 사건’입니다. 기네스북에 단시간 최다 살인으로 오른 사건을 모르는 분이 많습니다. 당시 전두환 군부가 공권력에 의한 범행을 축소하려고 철저히 보도를 통제한 겁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은 평생 이 사건을 가슴 속에 묻고 살았답니다.

“파리 잡으려 가슴 쳤다가 큰 다툼”

우 순경 참사는 황당한 일에서 비롯됩니다. 당시 동거녀 전모(당시 25세)가 파리를 잡으려 한 게 발단이랍니다. 야간 근무를 앞두고 잠을 자던 우 순경의 가슴에 파리가 붙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동거녀가 가슴을 치자 놀라 깬 우 순경과 크게 다투게 된 겁니다.

우순경 사건 발생 직후 다수의 사망자를 수습하기 위해 관을 공수하는 모습. 중앙포토

우순경 사건 발생 직후 다수의 사망자를 수습하기 위해 관을 공수하는 모습. 중앙포토

“홧김 근무…소총 2정, 실탄 129발 탈취”

우 순경은 홧김에 야간근무를 나간 후 희대의 범죄를 저지릅니다. 이날 오후 9시30분쯤 예비군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기를 곳곳에서 난사하면서 살인행각을 벌인 겁니다. 그는 당시 카빈소총 2정과 실탄 129발, 수류탄 6발을 갖고 있었답니다. 이때 궁류지서 앞을 지나던 행인이 우 순경 사건의 첫 희생자가 됩니다.

“우체국 난사…외부 연락 차단 후 범행”

우 순경은 행인을 살해한 후 궁류우체국 쪽으로 향합니다. 당시로선 유일한 통신시설이 있던 외부와의 연락을 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우체국에 들어가 전은숙(당시 21세)씨 등 전화교환원과 집배원 등 3명을 살해합니다. 이후 우 순경은 궁류면 내 4개의 리(里)를 돌아다니며 총기를 난사합니다.

우순경 사건 당시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옮기기 위해 진주ㆍ마산의 병원 앰블란스와 택시ㆍ트럭, 시외버스 등이 대거 동원됐다. 중앙포토

우순경 사건 당시 사망자와 부상자들을 옮기기 위해 진주ㆍ마산의 병원 앰블란스와 택시ㆍ트럭, 시외버스 등이 대거 동원됐다. 중앙포토

동거녀도 총기 맞아…불 켜진 집 노려

우 순경은 궁류지서와 우체국을 돌며 살인을 저지른 뒤 자신의 집이 있는 압곡리 매곡마을로 향합니다. 10분 후 마을에 도착한 그는 불이 켜졌거나 사람이 모인 집마다 무차별적으로 총을 쐈답니다. 이때 총탄에 맞은 동거녀 역시 파리로 시작된 다툼이 있었음을 말한 뒤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숨졌답니다.

“간첩이 왔다. 다 나와 보시오” 유인

집에서 나온 우 순경은 운계리 궁류시장으로 내려가 다시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시장에서 총소리가 나자 무슨 일인가 싶어 불을 켠 집이나 집 밖으로 나온 사람들은 또다시 숨져갔답니다. 이때 우 순경은 “간첩이 나왔다. 다 나와 보시오~”라고 소리를 질러 사람들을 끌어낸 뒤 살해하기도 합니다.

우범곤 순경이 수류탄을 탈취한 예비군 무기고. 중앙포토

우범곤 순경이 수류탄을 탈취한 예비군 무기고. 중앙포토

조의금 3000원 내고 술상…24명 살해

시장에서 18명을 살해한 우 순경은 자정쯤 2㎞ 정도 떨어진 평촌리에 도착합니다. 한 집에서만 24명을 숨지게 한 상갓집이 있던 곳입니다. 그는 당시 조의금 3000원을 내고 술상까지 받았답니다. 우 순경은 상갓집을 나온 뒤 산속에 있다가 다음날 수류탄을 터뜨려 자폭합니다.

유족, 40년의 한…올해 위령탑 착공

유족들은 40년이 지난 최근에야 꿈에도 그리던 소식을 접합니다. 올해 안에 위령탑과 추모공원을 착공한다는 말입니다. 오태완 의령군수가 지난해 12월 김부겸 국무총리를 만난 게 계기가 됐답니다. 오 군수는 지난 2일 직원 조회를 통해 이를 공식화합니다. “위령탑 하나 세우는 게 유족들의 40년간 소원이었다”는 말과 함께 입니다.

우 순경에 의해 숨진 희생자 동료 학생들이 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하고 있다. 중앙포토

우 순경에 의해 숨진 희생자 동료 학생들이 상여를 메고 장지로 향하고 있다. 중앙포토

아들 잃고도 사고 수습 “유족만 죄인”

40년 전 사건이 남긴 한(恨)은 당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말에 짙게 배어 있습니다. 당시 아들을 잃고도 궁류면장으로 사고를 수습해야 했던 전병태(87)씨는 지난 세월을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국가의 책임이 너무 큰 사건인데도 정부에 의해 사건이 묻혔다. 지난 40년을 추모행사 한 번 못하고 유족들만 죄인처럼 입을 다물고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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