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할머니 여배우가 꿈이에요" 소녀웃음 짓던 강수연 [강수연 1966~2022]

중앙일보

입력 2022.05.07 18:20

업데이트 2022.05.07 18:26

"저의 최종 목표라고 하면… 연기 잘하는, 관객에게 사랑받는 '예쁜 할머니 여배우'가 되는 게 꿈이에요."

7일 오후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강수연은 마흔일곱이던 지난 2013년 한 방송인터뷰에서 자신의 꿈을 이렇게 밝히며 소녀웃음을 지어보였다. 4살 때 아역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한 고인은, 지천명(知天命) 즈음 여러차례 인터뷰에서 자신의 꿈은 '할머니 여배우'라고 밝혀왔다.

어린 나이에 커리어 정점을 찍은 톱스타였지만 영화계에서는 무명 배우나 스태프 등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는 '맏언니'로 통했다. 영화 '베테랑'에서 배우 황정민의 명대사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자존심이라는 뜻으로 쓰인 속어)가 없냐"는 대사는 강수연이 영화인들을 챙기며 평소 하던 말을 류승완 감독이 가져다 쓴 것이다.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씨. 연합뉴스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씨. 연합뉴스

고인은 배우로서뿐만 아니라 영화계의 대소사에도 앞장서며 영화계가 풍파에 흔들릴 때 중심추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 출범 초기부터 심사위원·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했고,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 사태로 영화제가 위기에 직면한 이후인 2015~2017년에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재건을 이끌어냈다.

2015년 7월 부산국제영화제(BIFF) 공동 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강씨가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임시총회가 열린 부산시청 1층 대회의실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2015년 7월 부산국제영화제(BIFF) 공동 집행위원장에 선출된 강씨가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임시총회가 열린 부산시청 1층 대회의실에서 소감을 밝히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1999년 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 이틀째를 맞아 부산 중구 남포동 PIFF광장 특설무대에서 안성기,박중훈, 강제규 감독 등과 국내 영화산업을 지키기 위한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선포식에 참석한 강수연(오른쪽 두 번째). 연합뉴스

1999년 부산국제영화제(PIFF) 개막 이틀째를 맞아 부산 중구 남포동 PIFF광장 특설무대에서 안성기,박중훈, 강제규 감독 등과 국내 영화산업을 지키기 위한 스크린 쿼터 사수를 위한 백만인 서명운동 선포식에 참석한 강수연(오른쪽 두 번째). 연합뉴스

4살 길거리캐스팅…TBC 전속으로 배우인생 시작 

강수연은 4세에 집 앞에서 길거리 캐스팅 돼 TBC(JTBC 전신) 전속배우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 '엄마' '아빠' '안녕하세요'와 같은 단어만 말할 수 있었던 때였는데 작은 얼굴에 올망졸망한 이목구비가 눈에 띄었다고 한다. TBC '똘똘이의 모험'(71)이 첫 출연작이다.

당시만 해도 아역배우가 많지 않아서 고인은 스크린·브라운관을 오가며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KBS 청소년 드라마 '고교생 일기'(83)에 출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성장했다. 고교생 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었고, '고래 사냥 2'(85),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87)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스물 한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씨받이'(87) 출연은 그를 '월드스타' 반열에 올려놨다. 당시 파격적인 노출신으로 화제가 됐는데, 고인은 생전 인터뷰에서 '씨받이'의 출산 장면만 4박 5일 동안 촬영했다고 밝혔다. 이 영화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한국 배우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 수상이라는 새 역사를 썼다.

1989년 7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참가했던 대표단 귀국 모습. 왼쪽부터 임권택 감독,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 [중앙포토]

1989년 7월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 참가했던 대표단 귀국 모습. 왼쪽부터 임권택 감독, '아제아제바라아제'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강수연,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 [중앙포토]

제27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강수연(왼쪽)·이덕화. [중앙포토]

제27회 대종상영화제 시상식에서 남,녀 주연상 수상자인 배우 강수연(왼쪽)·이덕화. [중앙포토]

1987년 12월 제26회 대종상 영화제 남녀주연상을 차지한 이영하와 강수연. 연합뉴스

1987년 12월 제26회 대종상 영화제 남녀주연상을 차지한 이영하와 강수연. 연합뉴스

임 감독과는 2년 뒤 '아제아제 바라아제'(89)로 또 호흡을 맞춰 모스크바영화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거머쥐는 영광을 누렸다. 비구니 역을 맡은 그는 영화 속 삭발 장면에서 실제 머리를 깎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여배우의 삭발은 쉽지 않은 결정이었는데 강수연은 "비구니 역이어서 머리를 깎는 것은 당연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연기에 대한 고인의 열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80~90년대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던 고인은 2000년대 들어서는 뜸하게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단편 '주리'(2013) 이후 9년 만에 넷플릭스가 제작한 연상호 감독의 신작 '정이'(가제)에 출연하면서 팬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었다. 고인은 이 작품에서 뇌 복제를 책임지는 연구소 팀장 서현 역을 맡았다. 모든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 중인 이 영화는 고인의 유작이 됐다.

강수연이 1987년 9월 '씨받이'로 제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귀국 후 서울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강수연이 1987년 9월 '씨받이'로 제44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귀국 후 서울 시내의 한 커피숍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 [중앙포토]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 [중앙포토]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 [중앙포토]

영화배우 고(故) 강수연. [중앙포토]

연상호 "한국영화 그 자체였던 분, 편히 쉬세요" 

연상호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한국영화 그 자체였던 분"이라며 "선배님 편히 쉬세요. 선배님과 함께한 지난 1년은 영원히 잊지 못할것"이라고 애도를 표했다.

넷플릭스 측도 "한국 영화계의 개척자였던 빛나는 배우 강수연님께서 금일 영면하셨다"며 "항상 현장에서 멋진 연기, 좋은 에너지 보여주신 고(故) 강수연 님과 함께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좋은 작품을 위해 최선을 다해주신 배우 강수연 님의 모든 순간을 잊지 않겠다"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덧붙였다.

한편 강수연의 장례는 영화인장으로 치러진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을 위원장으로 영화인장 장례위원회를 꾸리기로 했다. 이우석·임권택·정지영·정진우 감독, 황기성 제작자, 김지미·박정자·박중훈·손숙·안성기 배우 등이 고문을 맡았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2층 17호에 차려졌다. 조문은 8일부터 가능하며 발인은 11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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