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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실험일까, 새로운 재개발 모델일까…기로에 선 백사마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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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한 동네의 모습이 아파트 대신 이렇다면 어떨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백사마을은 국내 최초로 저층형 주거지보전사업으로 추진되다가 진통을 겪고 있다. 3 영역의 모습.[사진 참여 건축가]

재개발한 동네의 모습이 아파트 대신 이렇다면 어떨까.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인 백사마을은 국내 최초로 저층형 주거지보전사업으로 추진되다가 진통을 겪고 있다. 3 영역의 모습.[사진 참여 건축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백사마을’의 재개발 사업이 또다시 멈춰섰다. 2009년 노원구 중계동 일대 18만6965㎡가 주택재개발정비구역으로 지정됐고, 우여곡절 끝에 지난해 사업시행인가를 받았다. 일반분양 아파트 1953가구, 공공임대 484가구를 지을 계획으로 지난 3~4월에 조합원 분양에 들어가려 했지만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한은화의 공간탐구생활] #길·지형 보전하는 첫 시도 #분양 아파트 2배 공사비에 제동 #비싼 임대주택 감당할 수 있나 #보전하는 것이 더 비싼 이유

공사비가 문제다. 일반분양 아파트가 아니라 서울시가 매입하기로 했던 공공임대주택의 공사비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 이유다. 임대주택 공사비가 3.3㎡당 1100만 원대로, 분양 아파트의 2배가 넘는다. 서울시 관계자는 “임대주택 건축비가 같은 단지 내 분양주택 대비 2배 이상 필요하고 임대주택 매입가로 보면 다른 임대주택 매입비보다 약 7배 이상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임대주택 총 공사비는 약 1700억원으로, 사업비가 500억원이 넘을 경우 지방재정투자사업의 심사규칙에 따라 타당성 조사를 받은 뒤 행정안전부의 중앙투자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서울시의 입장이다. 심사 결과가 나오기까지 1년가량 걸린다.

백사마을 조감도. 뒤는 분양 아파트, 앞쪽은 임대용인 주거지보전구역이다. [사진 서울시]

백사마을 조감도. 뒤는 분양 아파트, 앞쪽은 임대용인 주거지보전구역이다. [사진 서울시]

분양을 기다리던 토지 등 소유자, 임대주택 건립을 기다리며 이주한 세입자 모두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다. 황진숙 주민대표회의 위원장은 “서울시가 주거지 보전사업을 하겠다며 의욕에 차서 10년 넘게 진행했던 건데 이제 와서 공사비가 너무 많이 든다며 타당성 조사를 하고 사업을 지연시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최초의 주거지 보전사업의 명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비싼 공사비에는 이유가 있다. 백사마을은 국내 최초의 주거지 보전사업으로 정비된다. 임대주택 사업지 즉 전체 대지의 28%가 옛 동네의 골목길과 자연지형, 주거·문화의 모습을 남긴 채 재개발된다.

2011년 오세훈 서울시장 시절 서울시에서는 “백사마을은 근대생활사 박물관이며 몽땅 밀어버리는 재개발 방식으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일부 보전방식의 사업을 제안했고, 2012년 6월 임대주택 단지를 저층 주거지 보전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사업의 급물살을 탔다.

당시 서울시는 “재개발 40여년 역사에 새로운 획을 그었다”고 자평했다. 전면 철거한 뒤 획일적으로 짓는 아파트 건립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재개발 사업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왼쪽이 일반 분양 아파트, 오른쪽 하단이 임대 단지다. [사진 서울시]

왼쪽이 일반 분양 아파트, 오른쪽 하단이 임대 단지다. [사진 서울시]

사실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낡은 주거지를 정비하기 위한 가장 경제적인 결과물이다. 오래된 집과 비탈길을 몽땅 밀고, 새로운 기반시설을 설치한 뒤 고층 아파트를 똑같이 짓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주로 민간사업으로 진행하기에 정부나 지자체에서 재정을 따로 투입할 필요가 없다. 지자체에서는 인허가권을 쥐고서 용적률(대지면적에 대한 건축물 연면적의 비율)을 높여주는 대신 임대주택, 공원 등을 기부채납 받는다.

이렇게 공공에서 반세기 넘도록 손 안 대고 코 푸는 방식의 주거환경개선사업을 펼친 결과,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일반가구 기준으로 2092만6710가구 중 51.5%가 아파트에서 산다. 결국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각종 편의시설과 교육시설 등이 새롭게 갖춰졌다. 아이들이 마음 편히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도 대부분 사유지인 아파트 단지 안에 있으니, 모두가 아파트에서 살기를 원하는 시대가 됐다.

백사마을 주거지 보전사업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했다. 왜 정비사업이라고 하면 싹 밀고 똑같은 아파트만 짓는 걸까, 기존의 지형을 살리고 연결하면서 다양한 유형의 집을 지을 수는 없을까. 왜 임대주택은 늘 아파트 단지 안에서 제일 후미진 곳에 대충 짓는 걸까, 좋은 임대주택을 지을 수는 없을까. 이를 구현하려면 공공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돈을 써야 했다. 결국 현실화 단계에 이르자, 서울시가 '비용 딜레마'에 빠진 모양새다.

보전은 왜 비싼가    

서울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다.  [중앙포토]

서울 중계동 104번지 백사마을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다. [중앙포토]

백사마을은 1960년대 도심 개발로 청계천·영등포 등에서 살던 철거민 1100여명을 불암산 자락에 강제이주시키면서 만들어졌다. 당시 주소가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중계리 산 104번지였고, 옛 번지수를 따 백사마을로 불리게 됐다.

철거민들은 산비탈을 스스로 개척해 길을 내고 집을 지었다. 71년도에 개발제한구역이 됐고, 절반가량을 임대주택으로 짓는다는 조건으로 2008년 개발제한구역에서 해제됐다. 이후 백사마을 전면 재개발이 추진되자, 서울시가 마지막 달동네를 보존해야 한다고 나섰다. 그 결과, 임대주택 단지를 저층형 주거지보전사업으로 추진하게 됐다.

건축가 10명이 2개 구역씩 맡아 2014년부터 설계를 시작했다. 설계 원칙은 이랬다. 첫째, 길의 모든 레벨을 현재대로 유지한다. 둘째, 집터 즉 필지를 유지한다. 셋째 생활 형태를 보전한다. 가난한 삶이었던 만큼 이웃과 공유하며 살아야 했던 공간 구조를 살려, 공유 임대공간을 많이 디자인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백사마을 주거지보전사업지에는 마을 공부방, 공유주방, 마을공방, 게스트룸 등과 같은 부대 복리시설이 118곳에 달한다.

 밀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대신 기존 길과 지형 지형을 살렸다. 주거지보전구역 내 17영역의 투시도.

밀고 고층 아파트를 짓는 대신 기존 길과 지형 지형을 살렸다. 주거지보전구역 내 17영역의 투시도.

 건축가 10명이 2구역씩 맡아 디자인했다. 14영역의 모습.

건축가 10명이 2구역씩 맡아 디자인했다. 14영역의 모습.

임대주택 484가구의 평면이 모두 다르다. 22영역의 모습. [사진 참여 건축가]

임대주택 484가구의 평면이 모두 다르다. 22영역의 모습. [사진 참여 건축가]

주택은 최고 4층 규모다. 필지와 길을 그대로 살리면서 디자인을 하니 484가구의 평면이 모두 다르다. 건물 동 수로 따지면 136채의 단독주택을 짓는 일과 비슷하다. 벽과 바닥을 공유하면서 똑같은 틀로 찍어내듯 만드는 아파트보다 공사비가 더 많이 든다. 더욱이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길이 많아 비용이 더 든다.

서울시는 공사비가 비싸진 이유로 신축으로 사업 방향이 바뀐 것을 탓한다. “2009년 당시 백사마을 임대주택은 기존 건물을 그대로 복원해 70년대 주거문화 생활모습을 보전하는 ‘리모델링형 주거지 보전방식’이었고, 이 경우 사업비가 일반 재개발 임대주택보다 적게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는 것이다. 오 시장 시절 추진하던 리모델링 사업은 저렴했는데, 박 시장 때 신축으로 바꾸는 통에 비싸졌다는 주장이다.

2011년 서울시가 처음으로 보전사업을 제안하면서 선보인 리모델링한 백사마을의 모습. [사진 서울시 ]

2011년 서울시가 처음으로 보전사업을 제안하면서 선보인 리모델링한 백사마을의 모습. [사진 서울시 ]

보전사업구역의 경우 건물 노후도가 심해 리모델링 대신 전면 신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진 서울시 ]

보전사업구역의 경우 건물 노후도가 심해 리모델링 대신 전면 신축으로 방향을 틀었다. [사진 서울시 ]

하지만 백사마을의 현실과 맞지 않는 이야기다. 백사마을 주거지 보전사업의 설계를 맡은 이민아 건축가(협동원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당시 집들의 90% 이상이 붕괴 수준이었고, 그나마 멀쩡히 남아서 리모델링할 수 있는 집이 5개뿐이었다”며 “이 중에서도 그나마 현재까지 남은 집 세 채를 리모델링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만약 서울시가 주택 리모델링만 했다면 상하수도나 정화조 문제 등 기본적으로 개선해야 할 기반시설을 외면하는, 모양내기식 보전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아파트가 아닌 다른 재개발, 비용 치를 수 있나    

이렇듯 '보전'은 값싸지 않다. 백사마을의 경우 원래 지형을 훼손하지 않고 하수도관과 전선 등 기반시설을 새로 설치하려다 보니 공사도 어렵고 공사비도 비싸졌다. 제대로 보전하는 것은 새로 짓기보다 어렵고 비싸다. 우리 사회가 보전을 위해, 더욱이 임대주택을 위해 이런 비용을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한다.

보전 방식도 마찬가지다. 지하주차장을 세 곳에 만들고, 4m 너비의 차로를 두 개 더 냈지만, 경사지와 좁은 길 탓에 새로 짓지만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집이 상당한 마을이 됐다. 과거 가난했던 사람들의 삶터를 이렇게까지 보전하는 것은 혹여 낭만적인 실험은 아닐까.

김광수 건축가(스튜디오 케이웍스 대표)는 “산악지형인 우리나라에서 싹 밀고 옹벽을 쌓아 짓는 아파트가 아닌, 다른 형태의 공동주택에 대한 고민이 지금까지 없었다”며 “과거 질서를 활용하면서 모여 사는 방식을 고민한 대안적 재개발을 처음으로 시도해보자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현식 건축가(기오헌 건축사사무소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저층이면서 외부공간을 담을 수 있는, 질 좋은 임대주택을 짓는 시도를 공공에서 한 번도 해보지 않았잖아요. 백사마을 주거지 보전사업의 성공 여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요. 하지만 아파트가 아닌 다른 공동주택을, 삶의 선택지를 늘려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게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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