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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아들 장징궈 동거녀 쌍둥이 낳자 “엄마 성 따르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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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27〉

간난 시절 장징궈는 보안사령관을 겸했다. 도처에 영수(領袖)를 옹호하자며 부친의 초상화를 내걸었다.

간난 시절 장징궈는 보안사령관을 겸했다. 도처에 영수(領袖)를 옹호하자며 부친의 초상화를 내걸었다.

1940년대 초 장시(江西)성 남부, 약칭 간난(竷南)은 장징궈(蔣經國·장경국)의 천하였다. 중심지 간저우(竷州)에 집무실을 차린 장의 행보는 전 중국의 관심을 끌었다. 정보기관들도 긴장했다. 다투듯이 간저우에 거점을 마련했다. 군통(국민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중통(국민당 중앙위원회 조사통계국), 삼청단(삼민주의 청년단), 헌병사령부 정보처 외에 ‘국민당 장시성지부 조사통계실’ ‘성 보안사령부조사실’ 요원들이 미래의 실력자 주위를 맴돌았다. 장징궈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고관들이 파견한 사람도 한둘이 아니었다. 군통 간저우 지부장 부인은 장징궈의 연인 장야뤄(章亞若·장아약)의 친구들에게 접근했다. 언니 동생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장(章)의 임신 소식을 남편보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에게 먼저 보고했다.

정보기관 요원, 장징궈 동거녀 미행

장제스 사후 쑹메이링은 미국에 상주했다. 100세 생일날 대만당국을 대표해 선물을 전달하는 국민당 비서장 장샤오옌. 쑹메이링은 장샤오옌이 55년 전 자신이 챙겼던 장야뤄와 장징궈의 소생인 줄 몰랐다. 1997년 3월 20일 뉴욕 맨해튼. [사진 김명호]

장제스 사후 쑹메이링은 미국에 상주했다. 100세 생일날 대만당국을 대표해 선물을 전달하는 국민당 비서장 장샤오옌. 쑹메이링은 장샤오옌이 55년 전 자신이 챙겼던 장야뤄와 장징궈의 소생인 줄 몰랐다. 1997년 3월 20일 뉴욕 맨해튼. [사진 김명호]

소문이 퍼지자 장징궈가 암수(暗數)를 썼다. 중성미 넘치는 여인을 물색해 남장을 시켰다. 장야뤄와 찍은 사진을 측근들에게 보여줬다. “야뤄가 이 남자와 결혼했다. 신랑과 함께 광시(廣西)성 구이린(桂林)에 가서 은신하겠다며 즐거워했다. 송별연을 열어줘라.” 믿는 사람이 없었다. 왕셩(王昇·왕승)이 난감해하자 화내며 소리를 꿱 질렀다.

귀는 속여도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장야뤄가 구이린으로 떠나자 간저우에 우글거리던 정보기관 요원들도 장(章)의 뒤를 따랐다. 장징궈는 장(章)을 주책없을 정도로 좋아했다. 변장하고 자주 구이린으로 갔다. 1986년 가을, 장징궈의 간저우 시절 운전기사가 44년 전을 회상했다. “구이린에서 재회한 장징궈와 장야뤄는 부부 같았다. 장야뤄는 구이린을 싫어했다. 다시 간저우로 가겠다며 떼를 썼다. 장징궈가 총명한 애들이 태어날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위로하자 알겠다며 고개 끄덕이던 장야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두 사람은 절에 가서 향 사르고 산책도 했다. 구이린을 뒤로 하는 장징궈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장야뤄가 아들 쌍둥이 낳았다는 소식 접한 쑹메이링은 기분이 좋았다. 장제스와 오찬하며 입을 열었다. “징궈가 쌍둥이 아들을 봤다. 손자가 두 명 늘어났다. 축하한다.” 밥 먹기를 그친 장제스는 한동안 말이 없었지만 기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한 차례 깊은 한숨 내쉬고 국방부장을 불렀다. “구이린 판공청에 군사회의를 준비하라고 지시해라.”

산모와 아들 보러 구이린에 와 있던 장징궈는 부친의 회의 소집 통보를 받고 짐작이 갔다. 쉬는 시간에 부친과 정원 거닐며 이실직고했다. 장제스는 긴말 하지 않았다. “모자를 잘 보살펴라. 한동안 소문을 차단해라. 지금 중국은 전쟁 중이다. 애들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다. 모자를 스위스에 보내는 것도 염두에 둬라. 이름은 내가 지어주마. 애들 성은 모성을 따르도록 해라.”

장야뤄는 실망이 컸지만 잠시였다. 외국어 서적 사고 가정교사 초청해 외국어 공부에 열중했다. 지방관들은 장제스의 중국인 며느리에게 신경을 썼다. 깍듯하고 극진했다. 고관 부인들은 더했다. 장야뤄가 마작하자고 부르면 나는 듯이 달려왔다. 앞으로 뭐가 될지 모르는 31세의 여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강보에 쌓인 두 아들에게 온갖 미사여구도 아끼지 않았다. 장(章)은 이목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장징궈의 부인으로 자처하며 광시성 명사들의 모임에 얼굴을 내밀었다. 마작과 만찬 초청에 응하느라 외출이 빈번했다.

지방관들, 장야뤄에게 극진한 대우

간난 시절 지역을 순시하는 장징궈(오른쪽 다섯째). 일곱째가 왕셩. [사진 김명호]

간난 시절 지역을 순시하는 장징궈(오른쪽 다섯째). 일곱째가 왕셩. [사진 김명호]

분만 6개월 후, 1942년 8월 14일 해 질 무렵, 장야뤄는 애들을 동생에게 맡기고 외출했다. 심야에 돌아와 밤새도록 토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튿날 새벽 동생과 함께 병원에 갔다. 의사가 왼손에 주사를 놓고 나간 지 몇 분 후 갑자기 두 팔 휘저으며 “눈앞이 칠흑 같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절규하더니 몸이 축 늘어졌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왔다. 코에 손대보고 진맥하더니 옆에 있던 동생에게 통보했다. “혈액중독이다. 사망했다.”

장야뤄의 동생이 장징궈에게 전화했다. “방금 언니가 사망했다. 온몸이 흑색으로 변했다.” 장은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통곡했다. 친구였던 광시성 행정처장에게 전화로 부탁했다. “일이 산적해 자리를 뜰 수 없다. 뒷일을 부탁한다.”

장징궈는 장야뤄의 모친에게 두 아들 장샤오옌(章孝嚴·장효엄)과 장샤오즈(章孝慈·장효자)의 양육을 부탁했다. 형제는 외할머니와 이모의 품에 안겨 사방을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본 패망 후, 네 살 때 난징(南京)에서 생부를 처음 만났다. 철혈(鐵血)의 장징궈도 혈육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끌어안고 대성통곡했다. 목이 메었던지 말도 제대로 못 했다. 겨우 한다는 말이 애들 이모를 훌쩍이게 하고도 남았다. “네 엄마와 나를 반씩 닮았구나. 눈언저리와 이마는 나를 닮았고, 하반부는 네 엄마와 똑같다. 자력으로 잘 성장해서 지하에 있는 엄마를 기쁘게 해라.”

1948년 말,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자 장징궈가 심복 왕셩을 불렀다. “장(章)씨 형제와 외할머니, 외삼촌을 대만으로 이주시켜라.” 대만에 둥지를 튼 장징궈는 이목을 피하기 위해 신주(新竹)에 형제의 거처를 마련해 줬다. 당시 신주는 한적한 시골이었다. 대만은 소문이 빨랐다. 형제와 만날 엄두를 못 냈다. 형제는 남들은 다 있는 부모가 없는 것이 궁금했다. 밖에서 놀다 들어오면 엄마 아빠가 누군지 외할머니를 물고 늘어졌다. 외할머니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지금 대륙에 있다. 너희들 엄마는 예쁘고 똑똑하다. 아빠와 할아버지도 아주 유명한 분들이다.”

1960년대 초, 홍콩 신문이 장야뤄의 사망에 의문을 제기했다. 대만이 발칵 뒤집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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